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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야망이 무너졌던 도시 스탈린그라드[Broken Hitler,s Ambition Stalingrad City]

슈트름게슈쯔 2012. 4. 25. 13:11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스탈린그라드 시내 모습 - 1941년

 

  

 

 

독일군이 쳐들어오기 몇개월 전의 스탈린그라드 극장 앞 풍경 - 1942년

 

 

 

스탈린그라드로 향하는 독일 제 16 기갑연대의 4호전차대

 

 

스탈린그라드 인근에 육박한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는 소련군 -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상공의 독일 JU-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 - 1942년 11월

 

 

 

방공호에 숨어서 독일 폭격기의 폭격을 지켜보는 스탈린그라드의 어린이들 - 1942년 8월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스탈린그라드 시내 분수대의 춤추는 어린이들과 웃는 악어의 동상

 

 

 

독일군의 폭격에 화염에 휩싸인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 1942년 8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는 시가에 대한 독일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방위 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 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피난 행렬이 방위 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1942년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 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이 돌과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소련군의 초기 방어 임무는 제1077 방공 연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주로 고사포를 보유하여 지상 목표에 대한 교전법은 거의 훈련받지 않은 여성 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부대원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여 진격해 오는 독일 전차와 교전했다.

독일군 제16기갑사단은 제1077연대의 모든 37개의 고사포를 모두 파괴하거나

우회할 때까지 이들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

전투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 방위에 참가하였다.

한동안 탱크는 계속 시내의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도색도 되지 않거나 조준경도 없는, 갓 출고된 탱크를 공장 노동자 가운데 자원자들이 몰고 전선에 나갔다.

8월 하순까지 독일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 강에 이르렀다.

남쪽을 향한 다른 진격도 이어졌다.

9월 1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의 포병과 폭격에 노출되어

위험한 볼가 강 도하를 통해서만 스탈린그라드 내의 부대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인근에 등장한 독일 마더 자주포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의 마더 자주포 - 1941년

 

 

 

볼가강을 건너는 독일군 보급차량의 행렬

 

 

 

독일군의 동향을 살피는 소련군 포병대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에 투입된 독일군의 슈트름게슈쯔 3호 돌격포 - 1942년 9월

 

 

병사들을 배치시키는 독일군 하사관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 최고 화력의 장비였던 장포신 4호전차

 

 

 

피괴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서 소련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50mm 대전차포를 포진시킨 독일군 -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지역으로 전진하는 독일군 - 1942년 9월

 

 

 

독일군의 거점을 공격하는 소련군

 

 

 

75mm 산악포를 끌고 전진하는 독일군 포병

 

 

 

스탈린그라드 시내 파괴된 건물의 벽돌더미를 헤치고 독일군 거점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소련군

 

 

 

파괴된 건물 지대에서 벌어지는 소련군과 독일군의 치열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군과 교전중 부상을 당한 소련군 병사

 

 

 

MP-40 기관총으로 소련군과 교전을 벌이는 독일군

 

 

 

파괴된 소련군의 T-34/76 전차옆에 81mm 박격포를 포진시킨 독일군

 

 

 

폭격으로 파괴된 스탈린그라드 역  - 1942년 10월

 

 

 

 

소련군으로 부터 노획한 PPSh-41 기관총을 든 독일군 하사관 - 1942년 10월 스탈린그라드

 

 

 

스탈린그라드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기진한 독일군의 초췌한 모습

 

 

 

스탈린그라드 소련군의 거점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독일군 -  1942년 말기

 

 

 

스탈린그라드 Akhtuba 강의 건너편으로 152mm 자주포를 이동시키는 소련군

 

 

 

스탈린그라드의 파괴된 공장 지대에서 수색을 나서는 독일군 - 19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격추된 독일군의 메샤슈미트(ME-109)전투기

 

 

 

소련군의 대공 포화에 격추된 독일 전투기 - 1943년 1월

 

 

 

파괴된 건물속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는 소련군

 

 

 

파괴된 건물속의 독일군 거점에 화염방사기를 뿜는 소련군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 거점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 생존 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 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 처분에 처해졌다.

사수 아니면 죽음이었다.

어쨌든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독일군의 군사 원칙은 기갑,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 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근접전을 시도했다.

추이코프는 이런 전법을 “껴안기”라고 불렀다.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 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아군의 화력 지원에 따른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법은 독일군의 근접 지상 지원과 포병 지원을 무력화했다.

모든 거리와 공장, 집, 지하실, 계단에서 사람과 사람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 삼아 생쥐 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예프 언덕이었다.

이곳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

어떤 반격 때에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 거점이 되었던 스탈린그라드의 곡물 사일로

 

 

또한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저장소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전투는 여기서 몇 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이 최후로 적을 소탕했을 때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저항의 규모로 볼 때 더 많은 소련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소련군 병력이 후퇴했을수도 있다).

시의 다른 부분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위하는 소련군 소대가 한 아파트 빌딩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빌딩은 시의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을 지뢰밭으로 둘러싸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빌딩은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이라고 불렸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 킬로미터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했다.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지휘하의 제13근위보병 사단은

마마예프 언덕을 비롯한 각종 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대활약을 했다.

그는 생사기로의 위기에서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친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로디나)을 위해 싸웠고 잠들다.”라고 갈겨썼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구경 800mm의 열차포(별명 도라)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도 독일군이 도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볼가 강 동안에 대규모의 포병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포격하였다.

독일군의 전차는 높이가 8미터가 넘는 폐허 더미 속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부서진 빌딩에 대전차포를 엄폐해 두었다가 전진해 오는 독일군 전차를 공격했다.

소련군 저격수도 교묘히 폐허를 이용하여 독일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인데,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다.

다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전투 기간 중 242명을 사살하였다.

그는 또 독일군의 악명 높은 저격수 하인츠 토르팔트를 사살했다고 알려졌지만(이것은 에너미 앳 게이트로  영화화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하인츠 토르팔트(혹은 에르빈 쾨니히)는 소련 측이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는 실제 전략 목표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는 전략 예비군을 모스크바 방면에서 볼가 강 저지로 이동시켰고,

항공기도 모든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동원했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막대한 긴장에 시달렸다.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는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추이코프는 습진 때문에 양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쌀 정도였다.

양측의 병사들도 근접 전투가 야기하는 심한 긴장감 속에 지냈다.

 

 

 

붉은 10월 트랙터 공장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는 소련군

 

 

 

스탈린그라드 붉은 10월(크라스누이 옥챠블리) 트랙터 공장의 근래 모습

 

 

 

스탈린그라드에서 배고픔과 추위, 부상으로 전의를 상실한 독일군

 

 

 

전선에 투입된 소련군의 BA-64 장갑차 - 스탈린그라드 남부

 

 

 

소련군 박격포대 병사들

 

 

 

스탈린그라드에 버려진 독일군의 마더 자주포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위의 위치를 공고히 했고, 포위망을 줄이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12월 포위를 모면한 독일 제4기갑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돈 집단군은

만슈타인 지휘하에 포위된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겨울 폭풍작전(Unternehmen Wintergewitter)을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격퇴하였다.

다시 한 번 혹독한 러시아의 동장군이 찾아와 볼가 강이 결빙하여 소련군의 보급은 쉬워졌다.

그러나 시내에 포위된 독일군은 식량, 난방 연료, 의약품 부족에 시달렸고,

수많은 병사가 동상, 영양실조,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12월 16일 소련군은 다시 두 번째 공세인 토성 작전 개시하였다.

이것은 추축군을 돈 강 너머로 몰아내고 로스토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코카서스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가 되어

독일의 남부 집단군 전체가 붕괴되는 꼴이었다.

독일군은 대규모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남아 있는 소규모 부대로 “기동 방어”를 시도하였다.

소련군은 로스토프에 근접하지 못했지만, A 집단군을 코카서스로부터 후퇴시켰고,

만슈타인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에서 250킬로미터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게다가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항을 겨눈 타친스카야 기습이 성공하여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상당히 감소되었다.

이제 독일 제6군은 모든 구원군의 희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제6군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계속 희망을 가지고 위치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몇몇 독일군 장교는 파울루스에게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을 뚫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명령 불복종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이러한 포위망 돌파는 포위 초기 몇 주에는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료가 부족하여 불가능했다.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군이 혹독한 소련의 겨울에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 언덕에 버려진 독일군의 75mm포

 

 

 

독일군이 숨어있는 거점으로 접근하는 소련군

 

 

 

독일군의 거점으로 공격하는 소련군 62연대 병사들 - 1942년 12웛 26일

 

 

 

독일군을 겨낭하는 소련군 저격병

 

 

 

PPSh- 41 기관총으로 독일군에게  사격을 가하는 소련군 - 1943년 1월

 

 

 

소련군에게 항복한 독일군 - 1943년 1월

 

 

 

강추위에 의한 동상과 기아로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군 병사

 

 

 

 

 

소련군에게 항복한 독일군 포로들의 행렬

 

 

 

볼가강 강변에서 항복한 독일군 포로들을 촬영하는 소련군의 종군 카메라 기사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 대장 - 1943년 2월 2일

 

 

 

독일군을 물리친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T-34/76 전차 - 1943년 2월

 

 

 

독일군에게서 탈환한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의  한켠에서 불을 지피는 소련군 - 1943년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중앙의 건물 위에서 붉은색 적기를 흔드는 소련군 - 1943년 2월 2일

 

 

 

독일군에게 항복을 받고 스탈린그라드를 수복한 소련군 - 1943년 2월

 

 

 

전쟁전의 스탈린그라드 시내 모습

 

 

 

전쟁후의 스탈린그라드 시내 모습

 

 

 

 

독소전쟁이 끝난후 스탈린그라드의 춤추는 어린이들과 웃는 악어 분수대 옆에서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어린이들 - 1945년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혀 버린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에 의해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를 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 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탄약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특히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역(逆)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다시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 강 강둑으로 밀려났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 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 지원,

(3) 포로의 개인 소지품 소지 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 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 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1월 20일 크로아티아 의용군 부대를 이끌던 빅토르 파비치치가 전사하고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다.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1943년 2월 2일 항복한 독일군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만 1000명이었다.

이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 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갇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들중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하여 히틀러는

그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 라며 화를 내었다.

 

 

 

 

 

 

 

photo from : Foremsgamesqur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