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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바탄 반도 전투에서 항복하여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군들[WW2 Bataan peninsula U.S Navy Soldiers Surrender Prisoner of war,s Death March]

슈트름게슈쯔 2012. 6. 27. 10:51

 

 

마누엘 케손 필리핀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과 필리핀군의 파울리노 산토스 장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무렵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위계획에는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필리핀은 일단 포기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곳이었다.

필리핀은 미국이 쿠바의 독립문제로 1898년 쿠바와 필리핀에서 벌였던

미서전쟁 이후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스페인에 승리하여 획득한 식민지였다.

이후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중요한 미국의 근거지로 1947년쯤에 독립이 계획되어 있었다.

당시 필리핀 주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의 방어를 맡고 있었고

 개전이 임박해질 무렵에는 워싱턴으로부터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고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당일 대만에서 출격한

일본 육ㆍ해군 항공대의 공격으로 채 손쓸 사이도 없이 태반의 항공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리고 12월 10일 루손 섬 남부와 북부 지역에 상륙한 혼마 마사하루 중장 지휘하의

일본 육군 제14군은 미ㆍ필리핀 혼성군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고

22일에는 주력부대가 링가엔 만에 상륙 마닐라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한 미ㆍ필리핀 혼성군은 미군 정규군이 겨우 6천 명에

필리핀군이 11만 명이었지만 그 중 루손 섬의 방위병력은 6만 명에 불과했다.

 

 

코레히도르 섬 요새에서의 맥아더 장군과 그의 참모 서덜랜드 참모장

 

3월 10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속 명령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2주간이나 꼼짝도 않고 버티던 맥아더는

결국 지휘권을 웨인 라이트 장군에게 넘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 맥아더는 서남태평양지역 연합군총사령관으로 취임한다.

 

 

필리핀 링가엔 만에 상륙하는 일본 육군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 1941년 12월 24일

 

그는 필리핀 전투후 졸전으로 인한 문책으로 참모와 함께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웨인라이트 중장과 맥아더 사령관- 1940년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침공에 맥아더는 아예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빈약한 미ㆍ필리핀 혼성군을 울창한 정글과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마닐라를 마주보고있는 바탄 반도로 집결시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면서

그의 사령부를 마닐라 만 입구에 있는 요새인 코레히도르 섬에 설치했다

 

해가 바뀐 1942년 1월 2일 미군이 바탄과 코레히도르 섬으로 빠져나간

텅 빈 마닐라에 무혈 입성한 일본군 사령관 혼마는 1월 10일 바탄 반도에 공격을 개시하지만

미군의 맹렬한 포격과 저항에 막대한 피해를 입는 등

2주간이나 치고 받는 전투에도 성과는 커녕 미ㆍ필리핀군의 완강한 저항에 피해만 커졌다.

 

일본의 대본영은 필리핀 공략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 하에

홈마의 주력인 제48사단을 자바 침공에 돌렸고 그 결과 50일 정도 예상했던

필리핀 전투는 2월 중순이 지나도 여전히 바탄 반도를 점령하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후퇴하여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전투로 인한 피해도 막심했지만 말라리아, 이질 등의

열대질병으로 인한 병력의 손실도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초조해진 혼마는 마닐라를 비롯해 주변의 점령지에 수용되어있던

3만 여명의 필리핀인과 연합국 피난민들을 바탄 반도로 추방해버렸다.

미ㆍ필리핀군의 식량사정을 악화시켜 전의를 꺾고 항복을 앞당기겠다는 의도였다.

 

 

일본에 항복 서명을 하는 미군 역사상 치욕의 항복 회견장 - 1942년 5월 9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미군 사령관 웨인라이트 중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일본군 사령관 혼마 중장

 

 

 

5만명의 일본군 병력을 이끌고 미필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웨인라이트(Wainwright)로부터 3월엔 바탄,

4월엔코레히도르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던 마사하루 혼마 중장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리핀의 미군에게 항복 명령 방송을 하는 웨인라이트 중장

 

 

맥아더가 떠난 후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미ㆍ필리핀군은 외부로부터 구원의 손길도 차단된 채

일본군의 공격에 용맹하게 저항하며 극심한 식량난, 열대성 질병들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없는 기나긴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4월 9일 일본군의 총공격에 바탄 수비대가 항복을 하고

5월 6일에는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웨인 라이트 장군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미군에게 공격을 가하며 필리핀 바탄 반도의 끝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일본군

 

 

 

필리핀 바탄 반도의 미군 거점을 포격하는 일본군 포병대

 

 

 

일본군의 공격에 14인치 거포의 방어 포격을 가하는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미군 포병대

 

 

 

필리핀 바탄 반도 끝의 코레히도르 섬 미군 요새를 함락시키고 기뻐하는 일본 61군 병사들

 

 

 

코르레도르 요새를 함락시킨후 미군의 14인치 거포 앞에서 반자이 만세를 외치는 일본군들 - 1942년 5월 6일

 

 

 

함락시킨 미군의 코레히도르 요새에 입성하는 일본군 병사들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 요새를 함락시킨 일본군과  마린타 터널 입구의 안쪽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한 미군 

 

 

 

일본군의 포격에 파괴된 코레히도르 마린타 터널 입구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한 미군과 필리핀군 수비대 병사들

 

 

 

 

 

 

일본군에 항복한 미군과 필리핀군 - 1942년 5월 9일

 

 

 

 

 항복한 미군들을 한곳에 모아 감시하는 일본군 - 1942년 5월 9일

 

 

 

 

일본군에 의해 수용소까지 죽음의 행진(Death March)를 해야 했던 미 해병대 병사 포로들 - 1943년 6월

 

 

 

항복한 미군 포로를 이동시키는 일본군

 

 

 

 

 

 

 

 

행진중 굶어죽은 미군병사들

 

 

 

오도넬 수용소에서 사망한 자의 시체를 매장시키기 위하여 2인 1조로 메고 나르는 필리핀 포로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당시 미군에 대한 일본군의 잔학 행위를 묘사한 그림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 루트

 

 

전세계 최대 축구경기의 제전인 월드컵 경기에서는

월드컵 본선에 오른 국가들 축구팀의 경기를 정하기 위하여

각 조별로 경기 대진표 추첨을 벌인다.

그런데 세계의 3대 스포츠중의 하나로서 지구촌 다섯 대륙의 세계인들이

한마당으로 펼치는 이 축제에 난데 없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부터 섬뜩한 표현으로

죽음의 조라는 신종 용어가 등장 한다.

 

물론 죽음의 조라는 의미는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국가 대표팀들이

용호상박의 형세로 포진되어 있어서 준결승전을 향해

 치루어야 하는 경기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자가 아닌 보통 인간들은 그 누구나 죽음 앞에서 초연할수가 없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그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의 느낌 만으로도 그리 달갑게 다가 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죽겠다 라는 표현을

전세계에서 한국인들이 매일 매일 가장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미국의 유명 흑인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곡 성자의 행진은

귀에 익어서 그 연주곡의 제목은 몰라도 누구에게나 익숙한 경쾌한 그 멜로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성자의 행진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죽음의 행진이 있었다.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은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7만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를 강제적으로 행한 행진으로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리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적으로 행진시켰다.

카파스 까지는 열차를 이용했다.

다시 카파스 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로 행진하였는데

전쟁 포로 70,000명이 행진 과정 중 구타, 굶주림 등을 당했고

낙오자는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명~10,000명의 전쟁 포로들이 행진 도중에 사망했고

 54,000명만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으며

이 책임으로 필리핀 침공작전을 계획한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946년 4월 3일 마닐라 군사 재판 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된다.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하는 더글러스맥아더 원수 - 1945년 10월 20일

 

 

필리핀을 떠나면서 필리핀 국민들과 미군들에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I Shall Return)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레이테 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점령하고 1945년 1월 22일 다시 코레히도르 섬 요새를 접수하게 된다.

 

 

 

필리핀 레이테섬 아름다운 레드 비치의 맥아더 원수 레이테섬 상륙  5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조형물

 

 

 

포로수용소의 미군 병사들

 

 

 

미 제 6 레인져 부대에 의해 해방된 루손섬 Cabantuan 포로 수용소에서 환호하는 미군포로 병사들

 

 

 

 

 

2년여 동안 매우 고통스러운 일본군의 포로수용소 신세를 겪었던 

 

웨인라이트 장군의 타임지 커버 이미지

 

 

 

일본군의 수용소 포로 기간의 극심한 고생을 겪은 후 맥아더와 다시 만난 웨인 라이트 중장

 

 

 

일본군 포로에서 해방된 뒤 훈장을 수여 받는 웨인라이트 중장 -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난후 다시 만난 퍼어시발 중장과 맥아더 원수와 웨인라이트 중장

 

- 1945년 8월 31일 요코하마 뉴 그랜드 호텔

 

2차 세계대전 당시 말레이 반도의 싱가포르 주둔군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퍼어시발 중장과

필리핀 바탄 반도 코레히도르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항 미 해군의 웨인라이트 중장은

일본군에게 치욕의 항복 서명을 하고 전쟁 포로의 신세가 되어야 했었던 

똑 같은 비운을 경험했던 장군들이었다.  

 

 

 

 

 

 

미국 해군 미조리 함에 항복하러 온 일본군 항복 조인 전권단 일행

 

 

 

미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의 서명을 하는 일본군 대표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군 대표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郎) 육군 참모총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대한 조인식에 서명하는 맥아더 원수 - 1945년 9월2일 일본 토오쿄오만에 정박한 미조리 전함의 함상

 

서명하는 맥아더 원수뒤에 서있는 사람 2명은 웨인라이트 중장과 퍼어시발 중장

 

 

 

 

마닐라에서 전범재판을 받는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으로 알려진 연합군 포로학대 책임자로

전후 마닐라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승리후 전쟁이 끝난지 1년후인 1946년

 

그날의 치욕을 상기하기 위한 의식으로

 다시 소집되어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마린타 터널 입구에 모인 생존 미군과 필리핀군

 

 

 

 

photo from : ww2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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