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미사의 노래 니콜라이 종소리 소재는 서울 동방 정교회 니콜라스 성당

슈트름게슈쯔 2013. 8. 27. 17:33


독소전쟁 당시 1942년 봄 해빙기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러시아 정교회(Orthodox church) 근처를 지나가는 독일군 부대 - 1942년 

 

 

 

독소전쟁 당시 러시아 동방 정교회 앞을 지나가는 소련군

 

 


 

주현미 & 김준규 쌍쌍파티 5집 中에서 

 

 

1952년 한국의 원로 작곡가 이인권씨가 작곡하고 임영일씨가 작사한

 라틴 탱고풍의 가요[미사의 노래]속에 나오는 가사인

니콜라이 종소리는 바로 서울 정동 동방 정교회

니콜라스 성당의 종소리를 소재로 작사한 것이다.

 

 

 

 

정동 시절 성 니콜라스 성당의 모습 (1903 ~1967)

 

 

19세기 말엽 대한제국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제국 군인들과 30명의 민간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 공사관에 모여 사제 없이 주일과 축일에 기도와 찬양으로 성사를 대신하며 생활을 하였으나,

정교회 사제가 없어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가 없었고 성체성혈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볼랴놉스키 주한 러시아 공사는 1897년 1월 3일 본국에 대한제국에서 사목할 정교회 사제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1897년 7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러시아 정교회 주교회의가 한국 선교를 결정함에 따라

소규모 선교회가 조직되어 1897년 안에 한국에 입국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한국을 사이에 두고 열강들이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귀국해버렸다.

1900년 2월 17일 제 2차 선교회가 조직되었으며,대수도사제 흐리산프 솃콥스키 신부와

봉독자 이오나 렙첸코가 파송되었다.

그러나 한성에는 성찬예배를 집전할 정교회 성당이 없어서

독실한 정교회 신도였던 주한 러시아 공사가 제공한 관저를 임시 성당으로 꾸미고

1900년 2월 17일 성 테오도로스 대순교자의 축일에 성수로 축성되고 한국에서의 첫 성찬예배가 봉헌되었다.

초대 사제인 흐리산프 신부는 정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교리학습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그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된 교리서와 전례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어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어려워 중국 정교회 측에 요청하여

중국어 정교회 서적을 입수하고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예식서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리스 신신경,십계명을 번역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도 수는 점점 증가하여 공사관에 마련된 임시 성당은 신도를 수용하기에 협소하였다.

그리하여 1903년 4월 17일 고종 황제로 부터 정동에 땅을 하사받고 그곳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곳 정동 성 니콜라이 성당은 1967년 현재의 마포 아현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한국에서의 정교회 활동의 중심이 되어왔다.

대한제국 말기인 19세기에는 적지않은 한국인들이 궁핍과 기아를 피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일연해주 일대에 정착하여 체류하기 시작하였는데,

러시아는 이들에 대하여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일본은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러시아인들에게 강제 출국 명령을 내렸으며, 그중에는 선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업은 1906년 한국에 입국한

대수도사제 파벨 이바놉스키(Павел Ивановский) 신부에 의해 재시작되었다.

 1906년 부터 1912년 까지 한국에 머물던 그는 러일 전쟁당시 전몰한 러시아군 장병의 넋을 위로하려고

 묘비 건립을 추진하려 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더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선교회가 폐쇄되어,

러시아 교회에서도 한국 교회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1922년 2월 26일 한국 정교회는 일본 정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정교회 교리 수업은 일본의 감시하에서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교습받은 제1기생 중에서 첫 한국인 성직자가 된 강탁(요한) 신부가 나왔다.

191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강탁 신부가 일본 정교회의 도쿄 대주교 세르기로부터 사제 신품을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한국 정교회는 일본 정교회로부터 독립되었다.

1950년 6.25 동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유일한 정교회 사제 였던 김의한(알렉세이) 신부가

북한에 강제로 납치되어 생사가 불투명해졌다.

또한 전쟁 중에 떨어진 포탄에 의해 서울 정교회 성당이 크게 파손되고

얼마 안 되던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서 사실상 한국정교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군에 종군하던 대사제 안드레아스 칼키오풀로스 신부의

도움을 받아 신도들은 다시 모여들었고, 성당이 재건되었다.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안드레아스 신부는 한국인 신도 가운데 새로운 사제로 천거된

문이춘(보리스) 신부가 1954년 서품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사제가 된 문이춘 신부는 한국 정부가 국가재산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교회 재산을

오랫동안 소송을 벌여 승소해 되찾았으며, 정동에 있던 성당을 매각하고 마포구 아현동에 새로운 성당을 세워

 성 니콜라스 성당이라 명명하였다.

 

서울 아현동 동방 정교회

 

한편 당시 한국의 정교회는 교회 조직상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심사숙고 끝에 1956년 성탄절에  소집된 신도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콘스탄타노플리스 총대주교청 산하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의 정교회를 자신들의 담당 아래 두었다.

이후 한국의 정교회는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의 산하 기관인

뉴질랜드 관구에 속해 있었으며 2004년 6월 20일 에는 한국 교구가 관구로 승격되면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1982년 5월에는 한국에 처음으로 정교회 신학원이 설립되었다.

2008년 7월 20일 서울 아현동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그리스 출신의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조그라포스구장 주교의 착좌식이 있었다.

 

 

 

 

 

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조그라포스(53) 대주교 - 2013년

 

그리스 에게해 에기나섬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외대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