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그란사쏘에서 무솔리니를 구출한 독일 오토 스코르체니와 팔쉬름야거[WW2 Italy Gransasso Mussolini saved German Fallschirmjager Otto Skorzeny]

슈트름게슈쯔 2013. 11. 11. 21:18

 

 

 

 

 

 

 

 

 

 

 

 

 

 

 

 

 

 

 

 

 

 

 

 

 

 

 

 

 

 

 

 

 

 

 

 

 

 

 

 

 

 

 

 

 

 

떡갈나무 작전(Unternehmen Eiche)이란 이름으로

 

이탈리아 그란 사소 호텔에 억류되어 있던 무솔리니를 구출시키는 작전에 투입된

 

독일의 오토 스코르체니와 팔쉬름야거 공수부대 - 1943년 9월 12일

 

 

 

이탈리아의 가에타는  라티나 지방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 도시는 가에타만을 향하여 조금 뻗어나온 돌기 부근에 위치한다.

가에타는 로마로부터는 120 km 떨어져 있고 나폴리로부터는 80 km 떨어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캄파니아 주에 속했던 가에타를

 이탈리아의 중앙의 주요 주인 라치오 주로 배정하였다.

가에타주의 예전 이름은 테라 디 라보로였다.

가에타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캄파니아주에 복속되어 있던 곳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에타는 무솔리니 및 나치 동맹군에게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한후

이탈리아 내 제반 정치세력들은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7월 24일 개전 이후 소집되지 않고 있던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개최되었고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무솔리니의 총리직을 박탈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이탈리아 국왕은 무솔리니를 해임한 후 무솔리니는 가에타를 거쳐 폰차 섬의 감옥에 가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폰차 섬의 감옥은 무솔리니가 예전에 정적들을 수없이 가뒀던 곳이었다.

1943년 7월 24일 무솔리니는 국왕을 접견하고 빌라 사보이아를 나서려는 순간

출동한 왕실근위대에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군중들이 대규모의 수송 행렬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 날 당국은 가짜 공습 사이렌을 울렸다.

무솔리니는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쏘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DFS 230 글라이더를 띄워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히틀러는 오토 스코르체니 공수부대를 그란 사쏘로 급파시켜 무솔리니를 구출해낸 것이었다.

 

오토 스코르체니가 부상에서 회복되자 독일 친위대 내부의  스코르체니 친구는

히틀러(Adolf Hitler)가 창설을 지시한 특공대로 그를 추천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리더로 발탁되었다.

1943년 7월 그는 6명의 공군과 육군 특수전 전문가 중에서 히틀러의 직접 지목을 받아,

이탈리아의 실각한 독재자이자 히틀러의 친구로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구금되어 있던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혹시나 있을 구출자를 염려하여 계속하여 무솔리니의 거처를 옮겼고,

 2개월간 끊임없이 습격의 기회를 노리던 스코르체니는

그 자신이 직접 항공 정찰을 통해, 그리고 헤르베르트 케플러(Herbert Kappler)를 통해 알아낸

무솔리니의 위치와 주변지형 정보를 통하여 9월 12일 오크작전(Unternehmen Eiche, Operation Oak)을 개시하였다.

슈코르체니의 팀은 그란 사쏘(Gran Sasso)의 캄포 임펠라토르 호텔(Campo Imperatore Hotel)을 글라이더로 기습했다.

그리고 단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로마를 경유해 베를린까지 호위하였다.

이 위업으로 그는 범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철십자 훈장보다 상위인 기사 철십자장(Knight's Cross)을 받았다.

 

 독일군은 이탈리아 가에타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연합군에게  이 곳이 장악당할것울 우려한 나머지,

이 도시를 점령하고는 대부분의 주민들을 강제로 밖으로 추방하였다.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으로부터 5 킬로미터 떨어진 경계선부터 추방이 시작되었다.

곧, 이 경계를 벗어난 지역에서도 주민 추방이 실시되었다.

 결국, 가에타 주민들은 가에타를 완전히 떠날 것을 명령받았다.

수용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는 독일로 압송되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