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요아힘 파이퍼의 최후[Joachim Peiper's Final]

슈트름게슈쯔 2013. 12. 29. 15:24

 

 

 

요아힘 파이퍼( Joachim Peiper : 1915  ~1976)

 

 

 

 

쿠르스크 전선의 요아힘 파이퍼 - 1943년

 

 

 

 

히틀러에게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직접 수여받는 요아힘 파이퍼

 

 

 

미하일 비트만 중위의 타이거-1 전차 승무원들을 격려하는 요아힘 파이퍼 중령

 

 

 

 

 

발지전투 당시 아르덴느의 요아힘 파이퍼 - 1944년

 

 

 

 

 

 

종전후 전범 재판을 받는 요아힘 파이퍼

 

 

 

 

 

 

하인리히 히믈러의 부관이었던 요아힘 파이퍼 -1940년

 

 

 

 

 

 

요아힘 파이퍼는 1933년 나치 친위대 SS에 입대했다.

지원서를 살펴본 요제프 디트리히는 

그를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대였던 친위대에 입대를 승인했다.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 SS 친위대 예하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나기 전인 초기 SS시절에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히믈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아내인 지쿠르트를 만났고, 그 사이에 세 명을 자녀를 두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각각 아들 하인리히와 딸 엘케 그리고 질케이다.

특히 파이퍼를 총애했던 히믈러는 파이퍼의 영전에 매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SS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파이퍼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무장 친위대 대령으로 승진했을 뿐 아니라,

 당시 독일군 최고 명예 훈장 중 하나인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기도 했다.

 

 

 

 

 

 

 

지쿠르트와 결혼식을 올리는 요아힘 파이퍼 - 1944년

 

 

 

독일 친위대 기갑부대 연대장  요아힘 파이퍼 중령 - 1945년

 

 

 

요아힘 파이퍼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

 

 

 

요아힘 파이퍼와 그의 아내 지쿠르트와 그의 딸 질케

 

 

 

말년의 요아힘 파이퍼

 

 

 

프랑스인들에게 습격 받아 사망하기전의 요아힘 파이퍼

 

 

 

요아힘 파이퍼가 사망하기전까지 살았던 프랑스 오트 소느 트라브 별장

 

 

 

 

 요아힘 파이퍼가 살았던 프랑스 오트 소느 트라브 별장의 위치

 

 

 

 

도로에 흰색 페인트로 채색된 나치 친위대 SS 문양과 페이퍼의 이름  페이페르

 

 

 

프랑스 공산주의자 청년들의 방화로 불타버린 요아힘 파이퍼의 별장

 

 

 

방화사건이 발생한 요아힘 파이퍼의 주택을 살펴보는 프랑스 경찰과 언론기관의 기자들 

 

 

 

 

휘발유룰 뿌려 브러시로 아스팔트에 그려진 나치 문양과 파이퍼의 이름을 지우는 프랑스인

 

 

 

 

 

요아힘 파이퍼가 살았던 프랑스 오트 소느 트라브 별장의 흔적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기갑부대의 기갑 연대장 요아힘 파이퍼는 전범으로 수감된후 

대부분의 감옥 생활을 독방에서 보내게 된다.

그리고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감형으로 풀려났다.

1956년 12월 13일 석방된후 그는 전직 SS모임의 주선으로 포르셰 회사에 취직하여

 해외 판촉 직원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나치 전범으로서 외국의 기피 인물이었기 때문에 곧 퇴직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연합국이 아니라 독일에서도 과거청산작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도피해왔던

나치 전범들을 기소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파이퍼는 서독에서도 살기 어려웠다.

 특히 보베 학살 사건에 대해 추척해 온 이탈리아 인이 독일 재판소에 파이퍼를 고발하여

 파이퍼는 다시 법적 심판대에 섰다. 여기에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넘겼다는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또한 나치 전범인 베르너 베스트의 재판에 파이퍼는 다시 한번 법정에 섰으나,

기억에 없다는 증언을 반복하여 법적처벌을 모면하였다.

이후 잡지의 자유기고가등을 하다가 자신의 소유인 프랑스 별장이 있는

프랑스 오트 소느 트라브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했다.

여기서 그는 라이너 부시맨(Reiner Buschmann)이라는 가명으로 영국의 군사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프랑스공산당 소속의 반나치 저항운동가에게 신원이 노출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공산당에 보고되었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1976년 7월 14일 파이퍼를 죽일 거이라는 문구가 파이퍼의 집 담벼락에 쓰여졌다.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를 먼저 피난시킨 파이퍼는 1976년 7월 13일 밤 자택에 투척된 화염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부검 결과 방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인해

신체가 크게 훼손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실행범들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저항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의 범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photo from : Gamesqur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