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우크라이나 리보프 1941 유대인 학살[Ukrhine Jews Massacre In Lviv 1941]

슈트름게슈쯔 2014. 5. 7. 11:14











Lviv pogroms, Petlura days, July 27-29, 1941 - The Lviv pogroms were two massacres of Jews living in and near in the city of Lwów, the occupied Republic of Poland (now Lviv, Ukraine), that took place from June 30 to July 2 and July 25–29, 1941.




Lviv Pogroms, Ukraine, 1941 by Unknown Artist





The Lviv pogroms were two massacres of Jews living in and near in the city of Lwów,

 the occupied Republic of Poland (now Lviv, Ukraine),

 that took place from 30 June to 2 July and 25–29 July 1941 during World War II.

 According to Yad Vashem six thousand Jews were killed by Einsatzgruppen,

some Ukrainian nationalists and Ukrainian militia. #‎BeatsofHell‬ ‪#‎VictusVincimus‬










A Jewish woman standing naked on a Lvov street, surrounded by Ukrainian rioters, during the pogroms of early July 1941







Young Ukranian Teenagers throw stones at Jewish Woman • The Lvov Pogrom of 1941 in Ukraine

몰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달아나는 유대인 여성을 몽둥이를 들고 쫒는 우크라이나 리보프의 소년 - 1941년


나치 독일이 유대 인종 탄압과 인종 살륙 정책으로 야기시킨 다른 국가 국민들 내부 분열을 볼수있는 대표적인 장면이자

하루 아침에 같은 국민이었던 입장에서 돌변하여 이제 그들을 죽이려는 광적인 살인자들로 바뀌어 버린 인간들의 극명한 모습이다.





1941년 7월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리보프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의 주민들도 독일군을 해방자라고 부르며 열렬히 환영했다. 

당시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소련의 감옥은 정치범들로 넘쳐났다.  

당시 독일군 소위였던 볼프강 쇨러의 증언이다,

 “러시아 군인들이 지하실에 수류탄을 던져서 몇 사람은 피범벅이 됐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고 생존자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벽돌로 유리창을 막았어요.”  

수천 명의 정치범들은 소련 비밀경찰의 희생양이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많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당시 정치범들이 살해된 장면을 본 순간 독일의 소련 침공이 명분 없는 전쟁이 아님을 깨달았죠. 

우린 모두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소련의 만행을 막아야 했어요.”

  우크라이나 인들은 정치범 학살이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믿고 그들에게 시체들을 옮기도록 시켰다. 

나치스 친위대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주민들의 증오심을 부추겼다. 

폴란드계 유대인  칼 호로비츠의 증언이다.

 “당시 나치스 친위대는 그 사건을 선전 활동에 이용했어요.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고 주민들을 선동하기 위해서였죠.

 유대인들이 살인자라고 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어요. 

그 사건은 유대인들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비밀경찰의 소행이었어요.

”  나치의 선전활동은 효과가 있었고 학살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이레네 호로비츠- 폴란드계 유대인 “갑자기 이웃 마을에 살던 우크라이나 인들까지 몰려들었어요. 

그들은 모두 손에 도끼와 칼을 들고 왔습니다. 

다양한 부엌 기구를 들고 왔는데 그런 것들은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그들은 마을 곳곳에 서 있었고 아주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리보프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이 벌어지던 사흘 동안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학대를 받거나 살해됐다.  

“그들이 제 앞에 서 있었는데 제 얼굴은 피범벅이었어요. 

그 사람들과 학교도 같이 다녔어요. 

절친한 우크라이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친하게 지내면서 재미있었던 일도 많았죠.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갑자기 우린 같은 인간이 아닌 단지 유대인일 뿐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소련 공산당이 같은 일당이라며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당시 독일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당시 독일군 소위 페터 폰 데어 오스덴 자켄의 증언이다.

“솔직히 처음엔 분위기가 좀 묘했습니다. 

열성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한동안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독일의 젊은이들은 유대인들을 전 세계인들의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련 공산당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묵인하고 지나쳤죠. 

당시 상황이나 분위기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때 분위기가 그랬어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침공했던 곳마다 유대인 대량학살이 자행됐다





photo from : English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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