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에 점령당했던 영국 채널 제도의 저지섬과 건지섬[WW2 German Occupation to the British Channel Islands Jersey island & Guernsey island]

슈트름게슈쯔 2014. 5. 24. 14:17



저지섬을 점령한후 저지 거리에서 영국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독일군 장교 - 1940년 




독일군에게  점령된 뒤 지지섬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인 가족 

에디 올리브와 그녀의 아들 데이빗 뮬즈와 그녀의 남편 에디 뮬즈 


1943년 에디 뮬즈는 저지섬을 침략한  독일군을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기전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후 그는 다시 가족들을 볼수 없었다.




아이리스 불린과 그녀의 두 자녀 


전쟁이 시작되자 그녀의 남편은 영국 육군에 입대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점령이 끝날때까지 

저지섬에 머물며 참고 견디기로 결정했었다.




저지섬 유대인의 남자 장신구 상점에 붙여진 공지사항


1940년 9월 저지섬에  독일의 반유대법이 도입되었다.




영국령 저지섬의 1942~1945 독일군 행정관  Baron von und zu Aufsess




세인트 헬리어 도로 표지판에 씌어진 영국 승리의 표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사크섬 크후 부두 터널 입구에서 독일군과 동반하여 사진을 찍는 여성 




독일군에게 점령 된후 사크섬의 영지 바깥에서 시빌 해서웨이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독일군 장교들 - 1940년


 


사크섬을 해방시킨 영국군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빌 헤서웨이 부인 - 1945년 



위의 사진들은 1945년 5월 15일과 16일 영국의 환경 식품 농업부의 관계자에 의해 촬영된사진들이다. 

 독일이 영국령 채널 제도를 점령한 후  영국 본토와의 교역은 단절되어 버리게 된다. 

그에 따라 독일 점령군은 채널 제도 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게 되는데 그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1940년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섬에서는 식량 재고량이 점점 고갈되어 갔다. 

그러한 식량의 부족에 따라 주민들은우선  굶어죽지 않으려고 이듬해에 파종을 하려고 

 헛간에 저장해놓은 씨감자까지 털어 먹을수 밖에 없었다.  

먹을거리을 수입할수 없었던 섬에서는 채소조차  점점 부족해져 식량은 고갈되어 갔다.

 그러한 가운데 건지섬에서는 욕조에서 만든 수프를 판매하는 공동 공급센터가 세워졌다. 

시간은 흘러 5년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던  

채널 제도의 섬들은 비로소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연합군의 군사장비와 구호품및 식량이 도착하던날  

저지섬과 건지섬의 사람들은 그에 따라 환호하고 울고 웃었다, 

건지섬에 거주하던 시빌 해서웨이 부인이라는 한 여성은  

 이날을 위해 우리는 5년간을 기다렸던 만큼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굶주린의 고통은 너무나 값진것 이었다라고 말했다.





건지섬에 처음 배치된 독일군 군의관 알브레흐트 란츠(가운데)와 그의 참모 군의관 마스(왼쪽)와 뮬러 중위




휘발유가 아닌 말 두필이 이끄는 마력에 의해 기동되는 건지섬의 의료 구급차 


건지섬 점령후 가솔린 차량들은 독일군에 의해 모두 몰수 되었다.





건지섬에 위장된 오두막에 설치된 독일군의 마이러스(Mirus) 해안 포대 


독일군의 이 해안 포대는 1941~1942년 사이에 만들어져 배치되었다.





독일군의 공습후 파괴된 저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 줄리안 부두의 시계 타워와 자동차  - 1940년 7월 28일 




건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의 고몽(Gaumont) 궁전에 붙여진 히틀러의 초상화와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 서부전선 승리(Sieg im Westen) 영화 포스터




건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의 둔치 해안도로를 행진하는 독일군 




건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를 해방시킨 영국군을 환영하는 주민들




저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의 어느 집 입구에 붙여 놓은  마침내 자유라는 플랫카드와 영연방 국기들  




독일군의 항복 서명을 받은후 저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에 

5년만에 처음으로 게양되는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보며 감격하는 인파  




독일군 하이네 소장의 신분 증명서를 검사하는 영국 구축함 불독(HMS BULLDOG)의 장교 




건지섬에 도착한 영국 구축함 불독의 함내에서 항복 서명을 하기 전의 독일군 하네네 소장과 아르님 짐머만 중위 




영국 해군 구축함 불독 함내에서 독일군 짐머만 중위와 항복 회담을 하는 영국군 관계자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Admiral Stuart (Royal Navy), Brigadier General A E Snow (Chief British Emissary), Captain H Herzmark (German Army), Wing Commander Archie Steward (Royal Air Force), Lieutenant Colonel E A Stoneman, Major John Margeson, Colonel H R Power (all of the British Army) and Captain Lieutenant Zimmerman (German Army) 




영국 사진 기자를 보고 환호하는 건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의 주민들 

 



건지섬 세인트 피터 포트 해방을 환호하는 주민들 




건지섬 해방후 몰려든 손님으로 바빠진 라 리쉬(La Riche) 식품 가게 






영국 채널 제도 저지섬과 건지섬과 사크섬의 위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 해협에 위치해 있는 채널 제도(Channel Islands)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가까이에 있는  섬들을 말한다. 

채널 제도는 크게 두가지 섬으로 나뉘는데 그것은 건지 섬 관할과 저지 섬 관할로 나뉜다. 

채널 제도의 전체 넓이는 194km²이며 인구는 158,000명이다.

채널 제도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가 아니라 노르망디 공국의 일부였으며

 수장인 영국 국왕은 이 지역을 잉글랜드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노르망디 공작으로서 다스려 왔다.

 역사적으로도 잉글랜드보다 노르망디에 가깝고 노르만어의 방언들이 사용되나, 

백년 전쟁 이후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점유가 끝날 때 계속해서 

잉글랜드 왕실에 충성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영국령 노르망디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밖에서는 잉글랜드령 노르망디로서의 채널 제도의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 있는데

1259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영토 내의 모든 작위를 포기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국왕이 노르망디 공작을 칭하며 채널 제도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실질적으로 잉글랜드 영토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 문제로 인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영토 분쟁은 없다.  

현재 이 영토들은 자체의 입법부와 사법 제도, 자체의 조세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들의 국제 관계와 방위만 책임진다. 

EU와의 관계는 무역권에만 국한되어 있다. 

관세 관련 법규는 영국에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조건이 적용된다. 

EU 전체 안에서 사람과 서비스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확대 적용되지는 않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영국 안에서는 전통적 권리를 여전히 누리고 있다.





저지종 젖소 


저지섬은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는 

세계 젖소의 5대 품종중 하나로 젖소 중 최소형이지만 유지방과 무지유 고형분이 많은 

우유를 생산하는 저지종 젖소의 원산지가 바로 저지섬이다.

저지섬의 낙농업 또한 1789년부터 저지 섬에서 유일하게 키워온 수출용 저지 종(種)

 젖소 사육 위주로 이루어져 왔다. 




건지종 젖소 


 젖소의 세계 5대 품종중 하나인 건지종 역시 그 원산지는 건지섬이다.

건지종 젖소는 저지종 보다 대형이며 성질이 약간 신경질적이다.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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