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태평양전쟁 당시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Pacific War during Iwo Jima Mount Suribachi]

슈트름게슈쯔 2014. 9. 25. 13:23



이오지마 상륙전 함선에서 쌍안경으로 해안을 살펴보는 미 해병대 장교 -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격렬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 1945년 2월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이오지마는 오가사와라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유황도(硫黄島 -이오지마)라 불렸다.

유황도의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식수나 용수는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같은해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의 각지를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으며 

일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오지마에서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기 때문에 

B-29 폭격기들과는 달리 먼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는 호위 전투기들이 곧바로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호위 전투기들을 잃은 B-29 폭격기들이 일본군의 요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근거지로 하여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내려가 미군의 비행장을 자주 공격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12월에만 11기의 B-29를 파괴시켰다.  

그에 따라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주는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이오지마 해변에 상륙하여 전진하는 미 해병대 - 1945년 2월 19일 




수리바치산 밑의 일본군 거점에 폭격을 가하는 미 해군의 TBM 어벤져 뇌격기와 미 해병대의 37mm 대전차포 - 1945년 2월 20일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에 딸린 섬 이오지마에서 미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졌던  전투로

1945년 2월 16일부터 시작하여 1945년 3월 26일에 종결되었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후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3월 21일에 일본 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전원 단체 자살인 옥쇄(玉砕)를 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이오지마 전투는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였다.









이오지마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는 미 해병대 병사들 - 1945년 2월 19일 



왼쪽부터 아이라 헤이즈, 프랭클린 사우슬리, 존 브래들리, 할론 블럭, 

뒤에 잘 보이지 않는 두명은 마이클 스트랭크, 랜 가뇽. 

이후 마이클 스트랭크, 프랭클린 사우슬리, 할론 블럭은 이오지마 전투 중 전사한다.

미 해병대가 수리바치산 정상에 꽂아 세웠던 성조기 깃발은 원래는 더 작은 깃발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성조기를 좀 더 멋있게 찍기 위하여 두번째로 찍은 사진으로서  더 큰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다. 

맨 처음 새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해병대 대대장은 그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자!"라고 해서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이다.

조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어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에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다.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이 병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여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국채 판매의 광고맨으로 활용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대원들만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오지마 수리바치산의 미 해병대 병사들 - 1945년 2월 19일 






태평양 전쟁 당시 이오지마의 미국 AP통신 종군기자 존 로젠탈 







수리바치산 아래에 묻힌 이오지마에서 숨진  미 해병대 희생자들 



태평양전쟁 말기 이오지마에서 참전했다가 살아남은 병사들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모두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습할

 B-29 폭격기의 최전방 기지이자 재보급을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점령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을 가하게 된다. 

미군의 이오지마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전 전진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티니안이나 

사이판에서 B-29 폭격기의 항속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버려

 본토폭격에 고스란히 노출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특히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오지마 섬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photo f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