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처칠과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Winston S. Churchill & HMS Prince of Wales]

슈트름게슈쯔 2014. 11. 14. 15:15



대서양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해상의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갑판의 윈스턴 처칠 수상 - 1941년 8월 




제 2차 세계대전 초기 캐나다 동해안의 섬인 뉴펀들랜드(New Fou ndland)의 플레센티아만(Placentia Bay)에


 정박한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 1941년 8월 10일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영국 해군의 전함으로 킹조지 5세급 전함의 2번함이었다. 

이 전함은 14인치포 4연장 2기, 연장 1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전함의 이름은 당시 국왕인 조지 6세의 형인 에드워드 8세의 즉위 전 칭호인 황태자에서 따왔다.

잉글랜드에선 전통적으로 국왕이 즉위한 후 최초의 전함에는 국왕의 이름을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당시 국왕은 조지 6세였기에 당연히 이 함급의 1번함은 「조지 6세」가 되어야했다. 

하지만 조지 6세의 부왕인 조지 5세 때는 워싱턴해군군비축소조약에 의한 해군휴일(Naval Holiday)시기였기 때문에 

열강들은 신형전함의 건조가 금지되었다. 그 때문에 부왕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또한 그 형인 에드워드 8세는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린 왕관을 건 연애에 의해 

스스로 퇴위하는 바람에 그 짧은 치세와 이 함급의 건조는 시간을 맞출 수 없었고, 

그 때문에 1번함에 부왕의 이름인 「킹조지 5세」를 붙이고, 

형 에드워드 8세 시대의 칭호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2번함에 붙여주었다. 

조지 6세 자신의 이름은 즉위 전 칭호인 요크공작의 이름을 따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를 3번함에 남겼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카멜 레어드사 버켄헤드조선소에서 

워싱턴해군군비축소조약이 끝난 직후 1937년 1월 2일에 건조를 개시하여 1939년 5월 3일 진수한다. 

그로부터 1년후 의장도중인 1940년 8월에는 독일공군의 공격을 받는다. 

1941년 1월 19일에 존 리치함장 지휘하에 취역했지만 3월 31일까진 완성되지 못했다.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영국 처칠수상의 마음에 들게 되어 취역직후엔 

처칠이 세계최강 이라고 자랑한 전함이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충분히 숙련될 훈련을 받지 못한채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1941년 5월 24일에 최초의 전투를 겪게 되는데, 

덴마크해협에서 통상파괴를 목적으로 한 라인훈련작전으로 대서양에 진출한 

독일해군의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만나서 아군 후드와 함께 포격을 주고 받았다.

 이 해전에서 후드가 비스마르크에게 포격을 맞고 침몰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처음 일제사격을 퍼부은 후에 1번포탑이 고장났지만 

세 번째 사격에서 비스마르크의 연료탱크와 보일러실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조타함교가 피격당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리치함장은 무사했지만 항해장이 이 피격으로 전사했다. 

사령관 홀랜드 중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워커 소장의 지휘로 들어갔는데 5월 25일에 연료부족 때문에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 뒤 로사이스에 돌아온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6주간에 걸친 수리에 들어갔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태우고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접안하는 미 해군 구축함 맥두걸(USS McDougal DD-358)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울 영접하는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수병들 - 1941년 8월 10일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14인치 360mm 4련장 주포 밑을 지나는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보좌관 해리 홉킨스 -1941년 8월 10일











대서양상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갑판에서 만난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 1941년 8월 10일 






1940년 8월 영국 해군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처칠수상 일행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너서 북아메리카 캐나다 동부 뉴 펀들랜드 래브라도까지 갔다. 

8월 10일부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회담이 시작되었고 

12일에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함상에서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이 체결되었다

대서양 헌장은 제2차 세계대전중 1941년 8월 14일 영국의 처칠 총리와 

당시 비교전국이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북대서양에서 5일간의 선상회의 끝에 발표한 공동선언이었다.   

 대서양헌장은  대서양 선언이라고도 한다.  

공통의 목표를 규정한 서명서인 대서양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양국은 영토확장을 원하지 않는다. 

2,관련 주민들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는 영토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3,주민에 의한 정체(政體)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존중하고 강탈된 주권 및 자치권의 반환을 희망한다. 

4,국제통상 및 자원에 대한 모든 국가의 기회균등을 도모한다. 

5,노동조건의 개선 및 경제적 향상과 사회보장을 위한 국제협력을 도모한다. 

6,나치의 폭정을 파괴한 다음 모든 인류가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영토 안에서 생명의 보존이 보장되는 평화를 모색한다. 

7,공해의 자유항행을 확보한다. 

8,침략의 위협을 주는 나라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구적이고 

전반적인 안정보장제도를 확립하며 군비부담의 경감을 조장한다. 

대서양헌장은 후일 국제연합 공동선언(1942년 1월 1일)의 기초가 되었다





photo from : www.maritimequest.com

               www.atlanticcharter.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