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대

소련군 76.2mm ZIS-3 사단포의 전선 이동[Battle front transfer of soviet red army 76.2mm ZIS-3 divisional gun]

슈트름게슈쯔 2014. 12. 22. 16:12



독소전쟁 당시 러시아 남부 르제프 부근의  소련군 제 213 대전차 대대와 떨어진

지점에서 76.2mm  M1939 야포를 이동시키는 소련 178 보병사단의 포병대 - 1941년 





독소전쟁 당시 트럭을 이용하여 76.2mm  M1939 야포를 이동시키는 소련군




독소전쟁 초기 모스크바 외곽에서 76.2mm ZIS-3 대전차포를 이동시키는 소련군 - 1941년




독소전쟁 당시 레닌그라드 부근에서 소련군의 T-70 경전차에 의해 이동 되는 76.2mm ZIS-3 대전차포 - 1943년 2월 




독소전쟁 당시 눈덮힌 전선으로 이동하는 소련군과  76.2mm ZIS-3 대전차포




포탑을 제거한  T-70 경전차 야포 트랙터에 의해 이동되는 소련군 76.2mm ZIS-3 대전차포




76.2mm ZIS-3 대전차포를 이동시키며 얕은 개울을 도강하는 소련군 포병대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리를 이동하는 소련군의 76.2mm ZIS-3 대전차포 - 1945년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76.2mm ZIS-3 대전차포는 독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무기였다.

이 무기는 독소전쟁이 끝난지 5년후 한반도 38선 이남을 침략해 내려오는 

북한군의 주력 무기로 활용되게 된다. 

소련제 ZIS-3 대전차포는한국전 당시 북한군이 소련에게서 지원받아 남한을 침략하여 

동족을 살상시킨 원흉의 무기중 한 종류로써 일명 사단포로 불리웠다.

 사단포로 불린 소련군 76.2mm 포의 정식명칭은 ZiS-3 M1942 이다.

 ZiS-3 M1942 는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주력 대전차포 겸 경야포였다.  

76.2mm 포는 원래 개발목적은 경야포였으나 사실상 대전차포로 많이 사용되었다.

 ZiS-3외에도 많은 소련제 야포들은 기본적으로 대전차전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ZiS-3의 경우에는 발사각도가 최대 37도일 정도라서 

일부러 흙을 쌓아서 둔덕을 만들고, 둔덕의 경사면 위에 대포를 끌어놓는 등의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간접사격이 불가능하다는 것등 

사실상 야포로서의 지원능력은 크게 떨어져서 대전차포가 야포 노릇까지 하는 것에 가까웠다. 

 1940년 소련군은 당시 보유중이던 F-22 야포와 F-22 USV 야포보다도 

경량에 제작단가가 싼 76mm 야포의 개발에 들어갔다.

1년후 1941년에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함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전차이던 3호 전차와 4호 전차는 장갑이 얇아 

F-22 및 F-22 USV의 철갑탄으로 대항이 가능했지만 

갑자기 습격당한 초기의 전장에서는 스탈린의 사수명령 남발및 대숙청으로 인한 지휘관의 부족 등으로 

대다수의 F-22와 F-22 USV가 파괴되거나 독일군에게 포획되면서 상실했다. 

소련군은 부대 재편성을 위해 보충용 야포를 긴급히 도입할 필요가 생겼는데, 

T-34 및 KV-1 전차에 버금가는 장갑을 가진 독일의 중전차가 전선에 투입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ZiS-3는 1941년에 완성했지만 T-34의 양산을 방해한 그레고리 쿨리크 원수의 방해 및,

 소련군의 F-22 USV의 증산을 우선시한 정책 덕분에 ZiS-3는 경쟁심사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공식적으로 제조가 중지되었다. 

그러나 F-22 USV는 제작단가가 비싸고 포가구조가 복잡해 공정이 오래 걸려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에 스탈린은 독일전차에 대항가능한 화포생산을 허가하는 지령을 내렸으며,

 그 때까지 몰래 1,000문 정도를 생산하던 ZiS-3는 그제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1942년 2월에 5일간에 걸쳐 실시된 재심사결과, 모든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한 ZiS-3는

 1942년형 76mm 사단포로 공식채용되었다. 

그리고 대전중에는 45,000여문이 양산되었으며, 총 생산량은 103,000문 이상으로 파악될 정도로 대량 양산되었다. 

 ZiS-3는 ZiS-2 57mm 대전차포의 포가에 F-22 USV 야포의 포신과 

주퇴복좌기를 탑재한 형으로 개발되었다. 

포가의 경량에 의해 주퇴기와 복좌기가 견디지 못하며, 발포시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기에 

포구에는 76mm급 사단용 야포로는 처음으로 머즐 브레이크가 장착되었다. 

그리고 주퇴기와 복좌기는 유압식으로 만들고, 덤으로 폐쇄기도 반자동으로 만들어서 

자동으로 탄피가 배출되도록 하였다. 

또 ZiS-2 대전차포의 포가는 각도조절 핸들이 포 좌측에 집중되어 있어 조준조정은 1명으로도 충분했다. 

발사각은 F-22 및 F-22 USV와 비교시 약간 떨어졌지만 

야포 및 대전차포로의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또 제작단가도 포가의 간략화로 인해 F-22 USV의 3분의 2정도 비용이면 충분했다.

 당시의 소련군 유탄포 및 야포는 각도조절장치가 모두 우측에 있었기에 조준에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독일군이 포획한 F-22 야포는 7.62cm Pak 36(r)로 개조시 각도조절 핸들을 좌측으로 옮겼다.

  ZiS-3는 1개 사단에서 1개 대대당 12문으로 배치되거나 

6개 중대 24문으로 편성된 독립전차연대에서 사용했다.

 ZiS-3는 주로 직접화력 지원용으로 투입되었지만 대전차 전투에도 사용되었다. 

또 차량탑재형의 ZiS-3Sh는 SU-76 경대전차 자주포의 주포로도 이용되었다. 

포탄의 발사속도가 매우 고속이라 착탄 후 발사음이 날 지경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이 포는 랏체 밤으로 불릴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후 ZiS-3는 예비화포로 퇴역했지만 대다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과

 중동, 아프리카,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의 친소국가에게 제공되어 

현재도 일부의 개발도상국에서는 현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현재 러시아에선 대조국전쟁의 승전재현 이벤트를 위해 소수의 ZiS-3를 보관중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북한 해군의 월미도 수비대가 76.2mm ZIS-3 포 4문으로

 미국 해군 구축함 수 척을 격침시키며 3일을 버텨냈다.

  소련군 76.2mm ZIS-3 대전차포는 전문적인 대전차포로 개발된 것이 아닌

 사단용 경야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소련군 최고의 대전차포라고 볼 수 있다. 

 76.2mm ZIS-3 대전차포는 일단 저렴한 생산비용을 가지고 빠르게 양산이 가능하며,

 운용하기 편하고, 발사속도도 빠르며, 보병을 지원하는데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여러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원래 야포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관통력은 500m 에서

90도 각도의 장갑판에 명중했을 때 75mm 정도만 관통이 가능하므로 

3호 전차 및 4호 전차조차 장갑이 개량되면서 정면에서는 격파하기 힘들어졌고

 판터와 티거를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나마 판터를 상대로 할 땐 장갑이 얇은 측면을 노리거나, 

주포 방패를 근거리에서 노리면 도탄효과로 인해 포탄이 얇은 상부장갑을 관통하므로 

파괴가 가능했지만 티거 전차에겐  먹히지 않았다. 

일단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티거 전차1대를 상대로 최대 12문의 ZiS-3이 

일제사격하기도 했지만 잘 해봐야 일시적인 전투불능 상태에 몰아넣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1944년에 보다 대구경인 D-44 85mm 야포와 

BS-3 100mm 야포를 개발하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차 세계대전 내내 주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5년후 한국전쟁  6.25동란 때도 등장하여 한국군을 괴롭혔다. 

소련군 76.2mm ZIS-3 대전차포는 이미 구식인 소형화포지만 

근성으로 도수운반을 하여 산악지대에서 굴리는 이른바 산악포로 운영했는데

 대전차포로 사용가능한 명중률을 가진 만큼 아군의 방어진지에 명중률 높은 

직사공격을 해서 무척 괴로웠다는 참전용사들의 증언이 있었다. 

위력이야 야포나 박격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산비탈을 파서 만든 방어진지에는 큰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그러나 소련제 76.2mm ZIS-3 사단포와 그 사단포를 장착시켰던 

SU-76 수우까 자주포가 산비탈을 기어올라와서 

직사포격의 공격을 가했던 충격은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에게 공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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