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2차 세계대전시 3명의 독일군 귄터 [WW2 German Military Three Günther]

슈트름게슈쯔 2015. 4. 13. 15:10



귄터 폰 클루게 (Günther von Kluge : 1882 ~1944.8.19) 



귄터 "한스" 폰 클루게 (Günther “Hans” von Kluge 1882 ~1944년 8월 19일)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그는 포젠(현재 폴란드령 포즈난(Pozna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마르쿠스 클루게 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관학교 시절 지적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동료들이 [영리한 한스(kluge Hans)]라고 불렀다.

 그림 동화 중 그와 비슷한 등장인물 한스를 독일어로 [영리한, 현명한]을 

의미하는 [Kluge]로 바꿔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한스 귄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명에 물론 [한스]는 붙지 않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육군 대위로써 1916년 베르됭 전투에 종군했다. 

전쟁 후 바이에른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있으면서 1933년 소장으로,

 1936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해 4군 사령관으로써 1939년 폴란드 침공에 종군했다. 

1940년 5월에 개시된 프랑스 침공작전인 서방전격전에서는 4군을 이끌고 

아르덴느 숲을 통과해 프랑스군을 격파했기에 그 전공으로 같은 해 7월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해임된 페도르 폰 보크 원수를 대신해 

12월부터 중부집단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 시기 하인츠 구데리안의 2 기갑집단의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입장이었기에 

두 사람은 작전 지휘를 둘러싸고 대립하여 후에 결투 사건까지 벌어졌었다.  

1943년 10월 교통사고로 병가를 보낸후, 

1944년 7월부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후임으로 프랑스에 전개한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서부전선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쇄도해오는 연합군과 싸웠다.

독일국방군 내부에서 일어난 반 히틀러 활동의 주모자중 한사람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 소장은 

중부집단군에서 클루게의 작전참모을 맡았었다. 

클루게는 반 히틀러활동에 대해 복잡한 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트레스코우의 히틀러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기도가 실패로 끝난 후,

 반 히틀러세력에 대한 지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클루게가 연루된 것을 의심한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베를린으로 호출 명령을 받았다. 

그는 베를린으로 오는 도중 히틀러에게 "희망없는 전쟁을 끝내길 바랍니다"라는

 유서를 남긴 후 극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귄터 프린 (Günther Prien : 1908 ~1941.3.7)독일 유보트 잠수함 U-47 함장



귄터 프린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활약한 독일 해군 유보트(U-Boat) U-47의 함장이었다. 

그는 유보트 U-47 잠수함으로  영국 스코틀랜드의 군항  스캐퍼플로우에 잡입하여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HMS 로열 오크를 본거지에서 

격침시키는 대담함으로 독일과 영국을 놀라게 했으나 1941년 3월 격침되었다.

U-47은 2차대전 당시 유보트 에이스인 귄터 프린 함장의 지휘 하에 영국 해군의 군항인 스캐퍼플로우를 습격하여 

영국 전함 HMS 로얄 오크를 격침시켜 영국과 독일을 모두 놀라게 했다. 

이 작전 성공 이후 칼 되니츠 제독은 히틀러로부터 그동안 잠수함대의 발목을 잡았던 

족쇄를 모두 해제한다는 선물을 받게 된다. 

실상 되니츠가 귄터 프린으로 하여금 스캐퍼플로우를 기습하게 한 진짜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1941년 3월 7일, U-47은 실종되었고, 오랫동안 영국 구축함 울버린 호가 

아일랜드 서쪽 해상에서 U-47을 격침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 울버린은 다른 유보트인 U-A를 공격하고 있었다

(U-A는 원래 터어키 해군을 위해 건조하던 것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해군이 징발하여 사용한 잠수함이다). 

U-47과 45명의 승무원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어떤 기록이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고, 

기뢰나 기계 결함 등을 포함해서 가능한 다양한 어떤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국 코르벳함 HMS 카멜리아 (K31)와 HMS 애버투스 (K86)의 협동공격에 의한 격침도 확실하지는 않다.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에이스였던 귄터 랄(Günther Rall : 1918 – 2009.10.4)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제 3위의 에이스였던 귄터 랄은 적 전투기 275대를 격추시켰다.

 그는 부상을 딛고 1년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40기를 격추시킨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였다. 

또한 귄터 랄은 아프리카의 별로 불리는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처럼 디플렉션 슈팅(편차 사격)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졌던 파일럿으로 알려져 있다.  

귄터 랄은 1918년 3월 1일 바덴주 출생, 1936년 고교 졸업후 육군에 입대했지만,

 2년후인 1938년 8월 공군 파일럿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비행훈련이 끝난 1939년 8월 그는 소위의 계급으로 JG 52 제 3 비행대에 배속되게 되는데,

 이후 1944년까지 JG 52에 몸 담으면서 JG 52의 영광을 이룩하게 된다.  

귄터 랄의 첫 격추는 1940년 5월 18일 대 프랑스전에서였지만, 

이후 벌어진 영국 본토 공방전에서는 JG 52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941년 6월 개시된 소련과의 개전에서부터 그 역시 중위로서 

제 8 중대장으로 승격한 그는 그해 11월까지 30기를 격추시키게 된다.  

그러나 11월 28일 공중전에서 36기째의 격추를 기록한 직후, 

그가 격추한 적기의 공중 폭발로 시계가 가려진 사이 그의 비행기에 적기의 총탄이 박히기 시작했다.

동체의 날개가 크게 파손된 상태에서 그는 가까스로 애기를 몰고 아군 지역으로 귀환하여 

불시착을 했으나 이때 기체가 전복되면서 척추뼈를 크게 다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만다.  

그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으나, 의사는 당연히 앞으로 더 이상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다시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42년 8월 그는 기적적으로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가 동부전선으로 복귀한 때에는 이미 독일 공군에는 100기 이상을 격추시킨 수퍼 에이스들이 즐비했으며,

 이에 자극받은 그는 이전보다도 더욱 정력적으로 출격을 계속하여 복귀후 

1개월도 채 안돼서 65기까지 스코어를 기록한다.

이후 상부로 부터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고, 10월 22일에는 대망의 100기 격추를 달성하게 된다.  

1943년 접어 들면서 그의 격추행진은 계속되어, JG 52 제 3비행대장으로 승격한 직후인

 그해 8월 29일에는 헤르만 그라프와 한스 필립에 이어 전군에서 세번째로 200기를 격추시키는 위업을 이룩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 약 1년만에 164기를 격추시킨 것이다. 

이 공적으로 9월 12일에 전군에서 34번째로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이 수여되었고,

 그해 10월에는 한달동안 무려 40기를 격추, 당시 톱 에이스였던 발터 노보트니와 

엎치락 뒷치락하는 격추경쟁을 전개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노보트니는 250기 격추후 본국으로 귀환했고, 랄은 1943년 11월 28일 두번째로 250기를 격추한 후

 이듬해 4월까지 23기 격추를 보태 독일 최고 에이스의 자리에 올랐다.  

1944년 4월 19일, 그는 오랫동안 몸담은 JG 52를 떠나 JG 11의 

제 2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어 서부전선에 참가하게 된다. 

동부전선과는 전혀 다른 상대를 맞아 랄은 격추 페이스가 떨어졌고, 

2기 격추를 추가한 후에도 여전히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44년 5월 12일의 출격에서 그의 탑승기 Bf 109 G-5는 미공군의 P-47 전투기에 피탄되어

 그는 엄지 손가락을 잃는 부상을 당하고 가까스로 낙하산 탈출을 한다. 

이 부상으로 그는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또 다시 6개월간의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퇴원 후 그는 JG 300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격추 전과를 올리지 못한채 패전을 맞고 만다. 

만약 이 두번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에리히 하르트만이나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총 격추시킨 적기의 수는 275기여고  총 출격횟수는 621회였다. 

그리고 그가 격추당한 것은 총 5 차례였다.




독일 이름 귄터의 시조는 부르군디아의 귄터왕이었다.

게르만계의 남성 이름. 간혹 ü에 붙은 움라우트(¨)를 누락시킨 상태로 

귄터가 아닌 군터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귄터가 정확하다. 

유래는 전쟁(gund)과 전사(hari)의 합성어인 군다하르(Gundahar)이다.

  니벨룽겐의 노래에 '군터왕' 또는 '군나르'라는 이름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름을 지닌 실존 인물 4명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군인 귄터 폰 클루게 와 

독일 해군 유보트 잠수함 U-47의 함장이었던 귄터 프린과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에이스였던 귄터 랄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양철북을 쓴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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