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섬개구리 만세 - 1972년

슈트름게슈쯔 2015. 7. 2. 18:08




영화 섬개구리 만세의 신일룡과 김영애 - 1972년 



1970년대 전남  신안군 사치도 섬마을 국민학교 농구단의 우승 신화를 

영화로 만든 [섬개구리 만세] - 1972년 


상영시간  98 분  

  개봉 1973-04-18 

감독 정진우   

출연 신일룡, 김영애, 정창성, 박암



1970년대 당시 전라남도 신안군 사치도의 사치 분교의 당시 전교생은 약 60여 명 정도였다. 

이 국민학교의 교사였던 권갑윤·김선희 부부 교사는 농구단을 만들었다. 

비록 섬마을 분교였던 이 국민학교의 농구부는 1970년 전라남도 소년체전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다. 

그들은 제대로 된 고무농구공이 아니라 짚으로 엮은 농구공으로 가지고 뻘밭에서 농구 연습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72년 제1회 전국소년체전에서 농구 남자부에서 준우승을  하게 된다.

 당시 이 소식을 접했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사치분교 어린이들과 지도교사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리고 이후 사치도애는 선박의 왕래가 편리하게끔  선착장을 만들어주었다. 

육영수 여사는 평소 낙도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컸다. 

1965년엔 서남해 외딴 섬 흑산도 어린이들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고 싶어도 

거센 풍랑 때문에 자유롭게 못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해군 함정을 보내어 낙도 어린이들의 서울 방문을 도왔다. 

물론 이때도 어린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를 베풀고 선물까지 나눠줬다. 

1968년엔 전남 완도군 청산면 장도 어린이들이 "통학선이 없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고 편지를 보내자

 사재 100만 원을 내어 통학선을 만드는 데 보탰다. 

당시 섬마을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은 고마운 마음에 그배의 이름을 '청와호'로 지었다.  

1973년 4월 18일에 개봉한 [섬개구리 만세]. 배우 신일룡, 김영애와 함께

 사치분교 농구 선수들이 실제로 출연했던 정진우 감독의 

이 영화는 제10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촬영상, 남우조연상, 신인연기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다. 

 오늘날 가난하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전설같은 속담보다 

더 버거운 신화적 이야기로 취급을 받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술가 마의천 선생이 자식 나이 25세까지는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식의 인생이 좌우된다고 말했듯

오늘날 또한 대한민국에서는 부모의 재력에 따라 사는 집의 평수가 정해지고

 그 평수는 사회적 존엄의 크기로 작용되기도 한다.





















영화 섬개구리 만세의 배우 신일룡과 김영애와 나이어린 아역 배우 홍종현  - 1972년 




배우 신일룡은 1970년대 일약 청춘스타로 주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남배우였다.

신일룡씨의 본명은 조수현이다.

그는  4살 때 가족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에서 내려와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도와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후 배재고를 거쳐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재학 중 원로 영화배우 

최은희 선생과 고(故) 신상옥 감독에게 발탁되어 배우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예명은 신 감독에게 ‘운동을 통해 다져진 몸매가 마치 하나의 용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며 받은 것이다. 

    1970년 영화 '전쟁과 인간'으로 데뷔한 신일룡 씨는 이후 '증언' ' 물레야 물레야' 등 영화 80여편에 출연했다. 

또한 홍콩으로 건너가 이소룡의 배역을 맡는 등 배우로써 높은 주가를 올렸다. 

1976년에는 ‘아라비아 열풍’으로 제 15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영화인으로써 화려한 경력과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영화인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으나, 외식사업에도 관심이 있어

 뷔페, 한식당, 커피전문점 등 많은 업장을 운영했다. 

그 중 ‘시애틀 베스트커피’는 20개 매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는 등

 신씨는 요식업계 CEO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신 씨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제주도에 카지노호텔을 계획 중에 문제가 생기면서 사업이 기울기 시작, 

수백억의 재산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고 인생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신 회장은 “당시 19살 아들이 채식주의자인 아내의 건강을 위해 개발한 

호두파이의 맛을 보고 나서 재기의 가능성을 엿봤다”고 말한다. 

남은 재산 2천만원으로 조그만 파이가게를 오픈한 것이 W.NUT PIE의 기원이다.  

          파이반죽부터 재료 준비까지 모든 과정을 신 회장이 도맡아 했다.

 하루에 계란 2천개를 깨고 평균 9시간동안 반죽을 치대며, 아몬드도 직접 갈아 넣었다. 

그 탓에 손목에 류마티스 관절염이 걸릴 정도였지만,

 신 회장은 세상 어떤 것도 겁날 것이 없었다. 

 현재 W.NUT PIE는 청계산에 본점을 두고 온라인 판매를 겸하며 

‘건강한 재료로 만든 수제파이’로 남녀노소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1990부터 2000년대까지 인샬라.의가형제,공동경비구역 JSA,

봄날은 간다.선물,대장금과 친절한 영자씨등으로 

한국 연예계를 주름잡았던 이영애가 있었다면 1970년대에는 김영애가 있었다.

1972년의 MBC 사극 민비와 영화 섬개구리 만세는 그녀의 대표작이었다.

이후 1972년 왕십리 1976년 연산일기 1987년 까치 며느리 1991년 파도

 1999년 달려라 울엄마 2003년 황진이 2006년 애자 2009년 아테나: 전쟁의 여신 

2010년 해를 품은 달 2012년 변호인 등에 출연하였다.


그러나 2014년 1월 10일 배우 김영애씨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출연 당시 

암투병 중이었다고 고백하여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에게 크나큰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녀는 1월 10일 오전 방송된 SBS '좋은아침'에 출연하여 

 지난 2012년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촬영 당시 암 투병에 대한 이야기를 밝혔다. 

 당시 김영애는 '해를 품은 달'에서 대왕대비 윤씨 캐릭터로 

배우 김수현이 맡은 이훤의 할머니 역할로 출연했었다.  

김영애는 생방송에 가까운 촬영스케줄을 소화하는 제작팀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췌장암 초기라는 사실을 숨긴 채 두 달 동안 병원만 드나들며 버텼다고 털어놨다. 

또한 몸이 아파서 소리 지르고 악쓰는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허리에 칭칭 끈을 조여 매고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김영애는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을 당시, "드라마에서는

 '제가 정말 암이에요?'하고 다시 한 번 더 물어보는 연기를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허탈한 웃음이 나오면서 멍하더라"는 심경을 전했다.  

 이어 그는 "드라마가 끝난 후 9시간의 대수술을 받고서 죽다 살아났다"며 

"수술 후 몸무게가 40kg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영애씨는 수술 후 몸무게가 40kg으로 줄은 사연과, 뉴욕에서 공부하는 아들 내외가 

한국에 나온다고 할까 봐 사부인에게만 이 같은 사실을 몰래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애씨는 자신의 또 다른 상처를 녹화장에서 고백했다.

 이번에 '내 사랑 나비부인'으로 안방극장에 다시 컴백한 김영애씨는

췌장암 투병 뿐만 아니라, 연기자로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순탄치 않았던 사건들을 이야기 했다. 

시청자들은 김영애씨가 항상 드라마에서 회장님 사장님 사모님 같은 역할과 

사극에서는 대비 캐릭터를 주로 맡아와서인지 김영애는 항상 우아하고 유복한 삶을 살았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항상 품위있는 역을 자주맡았던  그녀의 그러한 이미지 뒤에는 

어두운 과거 환경과 상처가 숨어있었다. 

알고 보니 김영애씨는 남동생이 셋이나 되는 매우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서, 

늘 돈 때문에 동시에 여러 작품에 겹치기 출연을 해야 했다고 밝혀 큰 놀라움을 주었다. 

그렇게 돈 때문에 고생했던 그녀가, 돈걱정 없이 연기를 하고 싶어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각종 논란으로 시련을 겪었고 사업문제는 동업자였던 남편과의 불화로까지 이어져 

두 번째 이혼마저 하게된 사연을 공개하며 안타까움을 샀다.  

이혼보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김영애씨는 두번째 이혼을 결심하고도 

언론과 사람들의 손가락질.. 여론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며 

쇼윈도부부로 한동안 살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홍종현은 필자와 서울 갈현국민학교 6학년 2반의 졸업 동기로 

1969년 mbc방송의 웃으면 복이와요를 제작한 

김경태 PD가 1970년대 초기 역시 mbc방송에서 평일

저녁 시간대에 매일 방영했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추에이션 코미디였던 

[부부만세]의 고정 게스트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씨와 김희자씨의 아들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홍종현은 1975년 5월 31일 출시된 하길종 감독의 영화[바보들의 행진]에서 

구두딱이 소년으로 출연했으며 그외 1970년대 중반기 까지 

여러 영화에서 아역배우로 출연한바 있었다.

그는 현재 모 방송국에서 PD로 활동한다고 한다.





photo from : mar.gar.in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