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헝가리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 전차들[Destroyed German Army Panzer Tanks in the battle of Balaton Lake Hungary]

슈트름게슈쯔 2015. 8. 18. 18:34



입춘 작전시 벌러톤 호수 근처의 전선으로 이동하는 독일 제 6 SS 기갑사단의 판터 전차와 Sdkfz 251 장갑차 - 1945년 3월 





소련군이 노획하여  벌라톤 호수 전투에 투입한 훔멜 자주포- 1945년 3월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 501 중전차 대대의 킹타이거 전차들






소련군이 노획하여  벌라톤 호수 전투에 투입한 판터 전차 - 1945년 3월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군의 판터 전차들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군의 약트 판터 구축전차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군의 약트 판서 구축전차들





벌러톤 호수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군의 G형 슈트름게슈쯔 - 1945년 3월 




입춘 작전은 독소전쟁 말기 1945년 3월 6일부터 16일까지 

동부 유럽 헝가리의 발라톤 호수 주변 지역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서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였다.

이 전투 또한 물량 공세를 퍼붓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를 일명 발라톤 호수 전투라고 지칭한다.

1945년 1월 20일 디트리히 SS상급대장 휘하 제6 기갑군에 헝가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루마니아 유전 지대를 탈환할 목적으로 입안된 공세에 참가하고,

포위망에 빠진 제9 SS 산악 군단 소속 병사 45,000여 명을 탈출시키기 위해 

부다페스트에 회랑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사단이 헝가리로 이동을 하고 있을 당시, 헤르베르트 오토 길레 SS대장의

 제4 SS 기갑 군단이 몇 가지 불운한 구출 작전을 개시했다. 

HJ는 LSSAH와 함께 제1 SS 기갑 군단 소속이 되어 부다페스트 함락이

 눈앞으로 다가온 1945년 2월 초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사단은 다뉴브 강에 위치한 그란 마을 근방에 형성된 

소련군의 강력하고 견고한 돌출부인 그란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HJ와 LSSAH는 분투했고, 그 결과 2월 말에 소련군의 교두보는 분쇄되었다.  

사단은 이어서 루마니아 유전 지대를 탈환할 목적으로 입안된 입춘 작전에 참가했다. 

작전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을까하고 노심초사했던 히틀러는 

공격이 개시되기 전까지 일체의 정찰 행위를 엄금했다. 

끔찍한 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1945년 3월 6일 공격은 순조롭게 개시되었다. 

해빙으로 인해 대부분의 도로가 진창길로 변한 탓에 

독일군은 몇몇 소로를 비롯해 지극히 제한된 진격로 밖에 이용할 수 없었다.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을 포위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던 

소련군의 역공으로 공세는 무산되었다. 

소련군은 3월 16일을 기해 반격을 감행했다. 

전선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력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6SS기갑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당시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가 했던 농담 – “왜 우리 부대 이름이 제6SS기갑군인지 아는가? 

전차가 6대뿐이라서야.” – 처럼 사실상 이미 전력으로서의 가치를 거의 잃다시피 한 상태의 부대였지만,

 그래도 당장 헝가리 방면에서는 가장 유력한 독일군 부대이기도 했던 

제6SS기갑군이 후퇴하면서 헝가리 전선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이 사태에 히틀러는 제6SS기갑군 사령관 디트리히 SS상급대장 이하 

무장SS 장병들의 특권이었던 사단 수장, 흔히 암밴드라고 부르는 사단명을 

수놓은 소매띠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격분했다.

 나약한 국방군도 아니고 당의 군대인 SS가 전의를 잃고 비겁하게 도망쳤다는 것이 

히틀러가 격분한 이유였는데, 당시 상황으로 보면 도리어 히틀러 쪽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다.  

이런 요구에 이때까지 히틀러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을 과시하던 요제프 디트리히마저 

그런 히틀러의 처사에 격분한 나머지 자신과 주요 간부들의 암밴드를 

모두 모아 <요강>에 담아서 히틀러에게 직송하는 무례를 범했다. 

암밴드라는 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걸 착용한다는 것 자체가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정예 부대원을 상징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이제 피차 서로를 상관과 부하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였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히틀러와 디트리히의 인연은 이날 사실상 끝장난 셈이었다. 

  이 패배 이후 소련군은 3월 말부터 오스트리아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고, 

독일군은 그런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할 힘이 없어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그 결과 4월이 되기 전에 소련군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진입했고 

4월 3일부터는 빈을 무대로 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무려 85개 사단 70여만 명의 소련군에 맞서는 독일군은 정확한 숫자조차 집계하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제6SS기갑군 예하대밖에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며칠에 걸친 시가전 끝에 4월 13일에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독일은 이미 헝가리 방면의 대패와 비엔나의 함락조차 

별 일 아니라고 봐야 할 정도의 궁지에 몰려 있었다. 

베를린을 향한 소련군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져 미군과 영국군이 물밀듯이 독일 영내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입춘 작전, 그리고 그 참패와 빈 함락이 가져온 가장 큰 군사적인 의미는 

고작해야 (이 전투에 투입되었던 무장SS 정예부대의 잔존 병력이 부차적 전장인 오스트리아로 퇴각, 

결과적으로 소련군이 아니라 미군에게 항복하는 데 성공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을 정도였다. 

 만약 히틀러가 자신의 참모들이 요구하는 대로 헝가리 방면 작전을 취소했다면, 

제6SS기갑군은 당시 동부전선에서 싸운 수많은 부대들에게 걸린 운명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에게 엉망으로 얻어맞고 거의 부대 이름만 남은 상태에서 항복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 제6SS기갑군은 비록 장비의 대부분은 잃었어도 

어떻게든 인원만은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며 오스트리아로 후퇴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적지 않은 SS 대원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동부전선에서 스스로 저지른 만행의 대가로 

전쟁포로 대접도 못 받고 현장에서 총살당하는 운명은 피한 셈이었다.




photo from : tumb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