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기갑사단의 에이스 지휘관이었던 프란츠 베크[WW2 German Panzer Ace commander Dr. Franz Bäke]

슈트름게슈쯔 2015. 9. 6. 13:58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갑사단의 에이스 지휘관이었던 프란츠 베크(Franz Bäke)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육군 장교이자 전차 에이스였던  베크는 
제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였으나 그의 주된 명성은 2차 세계대전중 
전차 지휘관으로서의 전공을 통해 확고한 이미지를 남긴다.
전후 예비역으로 남은 베크는 시민으로서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그것은 1923년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 치대의 박사 학위 덕분이기도 했다.
프란츠 베크는 1898년 2월 28일 독일 헤센의 쉬바르쩬펠스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던 베크는 장래 의사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1918년 8월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진로를 바꿀 결심을 한다.  
1915년 5월 그는 여느 독일 청년과 마찬가지로 육군에 지원 입대를 하게 된다. 
쾰른 제3 보병연대를 나온 그는 기초 훈련을 받고 보병 제 11연대 소속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되게 된다.  
이후 그는 베르됭 인근의 플로뤼 및 쑤아몽 근처 마을인 
Fleury와 Thiaumont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용맹성을 발휘하여 
 2급철십자훈장을 받고 진급을 거듭하게 된다.    
1916년 중순 베크는 장교 후보생에 지원해보라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포병대로 자리를 옮겼고 1918년 부상을 입은 그는 휴전 후 
그가 완전히 징집 해제가돠는 1919년 1월까지 군에 남아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다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대학 1학기동안 그는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역시 의학이었고 1922년 주정부의 의과자격시험에 합격한다. 
1923년 의학박사까지 된 그는 아예 고향 하겐에 치과병원을 개업했는데
 아주 성황을 이룰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대전 사이의 혼란스러운 기간 내내 베크는 의사였고 1937년도에 예비역으로 가입하는데 
그는 1차 세계대전의 경력으로 장교지위와 함께 
제6 Aufklärungs Abteilung에 소속되는데 이는 마침 정찰부대였다. 
그는 1937년 4월 말의 대규모의 기동훈련에도 참가했는데 대위직과 의사직을 동시에 가지고 
여가를 내어 기동훈련 등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 후 의사업을 차츰 접어두고 전업 장교로의 길을 걷게 된다.  
1938년 1월 베크는 65 판쩌 Abteilung으로 소속을 옮기는데 
그는 여기서 첫 시작으로서 경전차대의 소조장을 맡았다.
 피를 전혀 흘리지 않았던 성공적인 수테덴 합병작전에도 가세한 그는 
 이 65 판저 Abteilung의 파견 중대장으로 활약한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한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베크는 폴란드전에 참전한다. 
여전히 65 판쩌 Abteilung의 경전차대를 지휘하던 그는 베르너 켐프의 제1l장갑군의 
제1 라이히테 사단에 배속돠어 9월 12일 작전에 들어갔으며, 
여기서 베크는 전차 지휘관으로 자질을 보여주었다. 
1939년 10월에 동 라이히테사단이 드디어 제6 기갑군으로 확대 재조직되고
 이 시기 베크는 예비역 Hauptmann으로 진급한다. 
1940년 5월 10일 베크와 그가 소속된 제6 기갑군은 대프랑스전에 참가하였다. 
구데리안이 지휘한 제6 기갑군은 아르덴느를 돌파하고 벨기에에 포박된 연합군을 둘러치기 시작했다.
베크는 제1중대 지휘관으로 뮤즈강변 Arques에 있는 다리의 교두보를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은 채 확보한다. 
그 다음주인 5월 17일과 19일의 전투에서 그는 두 차례 부상을 당하는데 
이로 그는 전상자 메달을 수여받고 교량 확보건으로 1급 철십자 후장을 수여받는다.
서부전역이 마무리 된 후 제6 기갑군은 동 프로이센에 주둔했는데 
여기서 다가올 대소련 침공전을 위한 훈련에 몰두했다.
 제6기갑군의 연대참모로서 이제 베크의 주된 임무는 고장, 피폭된 전차의 수리 운반, 재생의 업무을 맡았다.
 레프의 북부집단군에 배속된 6기갑군은 레닌그라드로 곧장 진격해 들어갔고 
이내 소련군과의 격렬한 전투에 말려든다. 
1941년 8월 1일 베크는 임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다.  
그가 맡은 전차 수리부대의 임무는 어렵고도 위험스러운 과제였다. 
대개는 어둠을 장막 삼아서 유기되거나 피폭된 전차에 어렵사리 접근해야했고 
간신히 수리 기지로 견인해 온 후 수리하기가 일상사였다.
 그런데 이런 전차들은 대개 적과 매우 밀착된 위치에 위치해 있기에
 상당한 조심성과 기민함을 발휘해야했다고 한다. 
그가 경험, 지휘한 수리 부대는 소련 침공 초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것으로 회상하는데,
 그에 말에 의거하면 대개는 24시간 안에 견인 수리 재 전장 투입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한다. 
1941년 10월 제6 기갑군은 갑작스럽게 중부집단군을 위해 이동을 했고,
 다시 한스 게오르그 라인하르트가 지휘하는 제3 기갑전투단의 한 부대가 되었다. 
 이 전투단은 모스크바 함락을 목표로 한 작전 ‘타이푼’의 임무를 맡았는데, 
12월27일에는 모스크바까지 단 19마일을 남겨둔 볼가 운하에 도달했다.
 대단히 거센 소련군의 반격으로 그 공세는 실패했다.
1941년 11월 중에 베크는  Ordannanz-Offizier직을 맡았는데
 이 직책의 업무는 주로 사단이 요구하는 특별 임무-극히 위험스러운-를 완수하는 것이다. 
제6 기갑군은 이 공세를 중앙집단군의 에리히 회프너의 
제4 기갑전투단의 한 부대로 임무를 끝냈다. 
 나름대로 1941년 겨울에 이 사단은 훌륭한 방어전을 치렀지만 
사단 내의 전차와 전차병들은 심각한 추위와 전투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모스크바인근의 전투 후 심각하게 손상 입은 제6기갑군은 프랑스로 가서 
휴식과 재보급, 재편성을 서둘라는 명령을 받는다. 
1942년 6월 1일 사단 11전차연대 11중대 지휘관이 되었다. 
1942년의 대부분을 후방 프랑스에서 새로 충원된 장교들과 관계를 넓히면서 
약체화된 사단의 재편성을 감독한다. 
한편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새로이 재충전된 6기갑군은 만슈타인의 돈집단군에 배속되어
 소련군을 공세를 막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1942년  추운 12월에 전선에 도착은 동 사단은 도착 즉시 제 6군을 해방시키기 위한
 대규모 전차전에 투입되는데 여기서 베크는 11연대 2중대 전차 지휘관으로 굉장한 능력을 발휘한다. 
베크는 하르코프까지 후퇴전을 수행하면서 소련군이 대규모 전선 돌파를 못하도록 
훌륭히 막아내면서 적에게 격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 훈공으로 1943년 1월 11월 베크에게 기사십자장이 수여된다. 
그의 사단은 하르코프 재탈환을 위한 전투에 돌입했으며, 
베크의 중대는 SS기갑사단(라이브 슈탄다르테-총통경호대) 및 
장갑척탄병사단(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 이들 사단에 손색이 없는 솜씨를 보였다. 
 포포프의 소련 전차부대를 격파와 함께 도시는 재탈환되었다. 
5월에는 전 사단이 휴식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베크는 독일 육군 최고의 유능한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언론 등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6월이 되어 호트의 제4 기갑군에 배속되어 쿠르스크 돌출부 
남측의 집게를 형성하려는 공세의 일환인 성채(치타델)작전이 시작되었다.  
베크와 그의 중대는 벨고로드 근처의 참호에 박혀있는 소련군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13일 그는 부상을 당했고 계속 전투를 지속한다. 
7월 14일 11연대의 지휘관이 중상을 입자 베크가 연대장이 되었다. 
가혹한 전투를 거친 뒤 연대 지휘관으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베크는 보여주었다고 한다. 
공세는 이탈리아에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8월 13일에 드디어 중지되었고 
베크의 연대도 드네프르 강까지 후퇴전을 격심한 전투 속에서 진행한다.
이후 베크는  성채작전기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에게 백엽검기사 십자장이 수여된다. 
 11월 1일 그는 특별 이무를 띤 기갑연대의 재충전을 명 받으면서
 그의 이름을 딴 ‘베크전차연대schwere-Panzer-Regiment Bäke’를 지휘하는 영예를 가진다. 
이 연대는 다수의 판터, 티거를 보유했으며, 자주포와 기계화된 공병단도 있었다. 
이 연대는 주로 동부전선의 소방수로 활약을 기대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1944년 1월에 Balabonowka의 포위를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5일간의 전차전울 치른 베크는 267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면서 단 1대의 티거와 4대의 판트를 잃었다. 
베크 자신도 전투 속에서 4대의 적 전차를 격파했고, 4개의 전차격파장을 받았다, 
이어서 코르순-체르카씨 지역으로 파견된 동연대는 
체르카씨 지역에 포위된 스테머만군을 구출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제1SS 기갑사단 라이브슈탄다르테와 함께 베크의 연대도 회랑을 돌파하는 시도를 한다. 
전투 후 베크는 돌파구를 만들었고 많은 독일군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체르카씨 공방전에서의 공으로 그는 백엽검기사십자장을 1944년 2월 14일 수여받았다.
3월이 되자 또 포위된 까메네츠-포돌스키 포위망을 해소하기 위한 전투에 
제1기갑군 소속으로 투입되는데, 여기서도 베크의 연대는 서쪽으로의 돌파로를 여는데 큰 기여를 한다.
 1944년 5월 1일 전선에서 물러난 베크는 예비역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의 연대는 이제 해산을 하고 각 부대가 원래의 모사단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의 연대는 다시 방어 작전에 말려들게 되는데  106 판쩌 Feldherrnhalle의 제대를 구성,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바덴 지역에서 황급히 편성된 부대는  구 SA 기간요원 등으로 구성된 형편 없는 사단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사태를 맞이하여 베크도 어울리지 않는 SA의 직함-Sanitäts-Standartenführer.-을 겸직하게 되었다. 
일견 약체일 수밖에 없는 이 여단은 최신의 판터모델로 장비까지 갖춘 완전 편제의 기계화 보병사단이었다. 
패튼의 미 제 3군을 맞이한 전투에서 베크의 여단은 매우 솜씨 좋게 싸웠으며 
수많은 미군의 공세를 저지하거나 전차를 파괴했다.
 하지만 그의 연대가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차츰 뒤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1945년 1월 베크는 예비역에서 다시 벗어난 전선으로 돌아간 유일한 대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45년 1월 하순에는 사단 명령으로 트레이딩 코스를 거쳐 3월 9일이 되면 
새로이 구성된 판쩌사단Feldherrnhalle 2의 지휘를 맡아 헝가리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베크의 사단은 체코와 헝거리를 경유한 후퇴 기간 내내 전투에 참전한다. 
4월 20일 베크는 준장에 진급한 다음 잔여 사단을 이끌고 서방으로 탈출 5월 8일 미군에 항복한다. 
베크는 전쟁 포로로 몇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1950년에 비로소 석방되게 된다. 
 이후 그는 고향 하겐으로 돌아가서 다시 치과를 개업했다. 

그리고 그는 1978년 사망할때까지 치과를 운영하였다. 

한편 그가 사망하자 서독연방군이 그의 장례식 영전에 영예의 치사를 올렸다. 






프란츠 베크 - 약력


▪ 1898년 2월 28일 슈바르젠펠스(Schwarzenfels) 출생. 
▪ 1915년 5월 19일 17세의 나이로 제 53 보병연대 자원입대. 
▪ 1차 세계대전 중 2급 및 1급 철십자장을 수여받음. 
▪ 1918년 11월 Vizefeldwebel (1차대전 당시까지 쓰이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보이지 않는 계급인데 중사 - Feldwebel 아래 계급) 으로 진급하고 

이어 제 7 도보포병연대의 사관후보생(Fähnrich)이 된다. 
▪ 1919년 1월 현역에서 예편. 
▪ 종전 이후에는 의학 공부를 계속해서 1923년 치의학에서 Doktor 학위를 받는다. 

이름에 Dr.가 따라다니는 것도 이 때문. 
▪ 1937년 12월 1일 현역으로 다시 소집되어 예비역소위(Leutnant der Reseve) 계급을 부여받고 

제 1 경사단 소속 제 6 수색대대(Aufkl.Abt.)에 배속된다. 
▪ 1939년 8월 1일부로 제 41 대전차대대(Panzerabwehr-Abt.) 소속의 소대장 임명, 폴란드전역 참가. 
▪ 1939년 11월 1일 예비역중위로 승진. 
▪ 1940년 1월 1일 제 65 전차대대 1중대장에 임명. 
▪ 1941년 2월 1일 제 6 기갑사단 제 11 기갑연대 작전참모(Ia). 
▪ 1941년 5월 1일 대위로 승진, 제 11 기갑연대 소속 기갑중대장에 임명. 
▪ 1941년 8월 1일 (임시) 소령으로 승진. 
▪ 1941년 10월 1일 제 11 기갑연대 작전참모(Ia) 복귀. 
▪ 1941년 12월 1일 제 11 기갑연대 1대대장. 
▪ 1942년 4월 1일 제 11 기갑연대 2대대장. 
▪ 1942년 8월 1일 소령으로 정식 승진. 
▪ 1943년 1월 11일 기사십자장 수여받음. 
▪ 1943년 7월 14일 제 11 기갑연대장. 
▪ 1943년 8월 1일 백엽기사십자장(Nr. 262) 수여받음. 
▪ 1943년 11월 1일 중령으로 승진. 
▪ 1944년 2월 21일 백엽검기사십자장(Nr.49) 수여받음. 
▪ 1944년 5월 1일 대령으로 승진. 
▪ 1944년 7월 13일 제 106 기갑여단장. 
▪ 1945년 3월 9일 제 13 기갑사단장. (이 사단은 후에 FHH 2 기갑사단으로 개명됨) 
▪ 1945년 4월 20일 소장으로 승진. 
▪ 종전 이후 포로가 되었다 1947년에 풀려남. 
▪ 1978년 12월 12일 하겐(Hagen)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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