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중국 윈난성 쿤밍의 2차 세계대전 말기 풍경- China Yunnan Province Kunming World War 2 Later years Scene

슈트름게슈쯔 2015. 12. 29. 15:42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천신만고 끝에 버마 레도 로드를 지나

중국 윈난성 쿤밍시에 처음 도착하여 

시내의 금마벽계방을 통과하는 

미국의 보급물자 수송 트럭 행렬 - 1945년


 



중국 남부 윈난성 쿤밍은 태양의 도시이다. 

쿤밍지역은 연평균 일조량이 2327.5시간에 달한다. 

그것은 대한민국 서울보다 약 300시간이 더 많은 수준이다. 

중국인들은 햇볕을 쬘 때 ‘샤이(曬, 쬘 쇄)’라고 말한다. 

쿤밍 사람들은 다르다. 

고기를 굽다는 의미의 동사 카오(烤, 고)를 써 ‘카오타이양(烤太陽)’이라고 한다. 

마치 화롯불을 쬐듯 태양을 쬔다.  

쿤밍은 고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해발고도가 1900m다. 해발고도는 역으로 기온을 낮춰준다. 

쿤밍은 1년 중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이 9.3도, 가장 더운 7월에는 22.2도에 불과하다. 

연평균 기온은 15.6도다. 

여름이 없는 셈이다. 

그러기에 쿤밍은 사시사철 봄의 도시 ‘춘성(春城)’으로 불린다.  

쿤밍의 구름은 많은 얘깃거리를 전해준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자손 장교(莊蹻)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지금의 쓰촨(四川)과 구이저우(貴州) 공략에 나섰다. 

장교는 돌연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마침 자신의 말을 끄는 몸종의 할아버지가 그를 찾아와 오색 구름 속 이상향을 알려줬다. 

솔깃한 장교는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향했다. 

어느 날 고산준령을 넘던 중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구름을 보았다.

 붉은빛 속에 녹색이, 녹색 속에 보랏빛이, 황색이, 다시 붉은색이,

 흰색이 피어나는 채운(彩雲)이었다. 

구름 아래로 홀연 푸른 산과 물로 둘러싸인 금색의 성문이 나타났다. 

화원(花園)과 같은 성 안에 사는 순진무구한 주민들이 이들을 반겼다. 

장교는 이곳에 안주해 스스로 전국(滇國)의 왕이 됐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쿤밍이다. 

『사기(史記)』 서남이전(西南夷傳)에 나오는 장교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쿤밍에 전해 오는 구름의 전설이다.  

한무제(漢武帝) 시기 장건(張騫)은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그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방에 도착해 보니

 이들은 이미 남방 실크로드를 통해 ‘서남이(西南夷·지금의 윈난성 지역)’와 물자를 교역하고 있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다. 

장건의 보고를 들은 한무제는 욕심이 발동했다. 

오색 구름이 머무르는 ‘채운남현(彩雲南現)’의 꿈을 꿀 지경이었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의 군대는 쿤밍을 점령해 전지(滇池)현을 설치했다. 

구름을 품은 것이다. 

훗날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잡은 칠종칠금(七縱七擒)의 무대가 바로 쿤밍 일대다. 

당(唐)대에는 남조(南詔), 송(宋)대에는 대리국(大理國)이 이곳을 다스렸다.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송을 치기 위해 대륙을 우회해 대리국을 정복한 뒤 운남행성을 설치했다. 

쿤밍은 비로소 제국에 편입됐다. 

 대륙의 남서문 … 홍콩·인도와 연결되는 교통의 허브  쿤밍은 외지다. 

대륙의 서남부 고원지대 속에 숨어 있다. 

굳게 닫힌 폐쇄적인 도시처럼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쿤밍은 대륙의 남서문(南西門)이다. 

차마고도는 그 시작이었다.  

쿤밍은 중원과 세 개의 길로 통했다.

 하나는 천전대도(川滇大道)다. 

쿤밍에서 이빈(宜賓)을 거쳐 쓰촨 청두(成都)에 이르는 도보로 22일이 걸리던 교통로다. 

다음은 전검대도(滇黔大道)다. 

쿤밍에서 구이저우성 구이양(貴陽)으로 통하는 20일 여정의 행로다. 

또 다른 길은 전계대도(滇桂大道)로 광시(廣西)성 구이린까지 24일이 걸리는 루트다.

 1882년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는 구리 등 쿤밍 일대의 자원에 눈독을 들였다. 

프랑스는 1910년 하노이(河內)로부터 쿤밍을 연결하는 국제철도를 뚫었다.

 전월(滇越)선, 중국 최초의 국제 철로이다.

 당시 청(淸)나라 마지막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윈난 출신 원가곡(袁嘉谷)이란 관리가 있었다. 

그가 1910년 10월 고향으로 돌아갈 때,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상하이로 내려와 배를 이용해 홍콩을 거쳐 하노이에 도착했다.

 이어 전월철도를 타고 쿤밍에 도착했다. 

보름이 채 안 걸리는 여정이었다. 

수 년 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갈 때 두 달이 걸리던 여정이 1/4로 줄어든 것이다.

  항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민당정부가 충칭으로 퇴각하면서 

윈난성 쿤밍은 대외창구로 변했다. 

쿤밍의 비행장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홍콩, 인도와 충칭을 연결하는 허브공항이 됐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물동량이 많은 공항이었다.

대일본 항전 시기 쿤밍은 중국의 대후방에서 돌연 최전선이 됐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베트남 하노이와 버마를 점령한 뒤 쿤밍을 옥죄었다. 

풍전등화 신세, 60여만 명의 군대가 쿤밍에서 항전을 이어갔다. 

암울했던 전쟁기간 동안 쿤밍은 역설적으로 중국인들의 정신적 수도가 됐다. 








photo from : www.cbi-theat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