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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ISU-122 자주포의 동절기 위장 채색- Soviet Red Army ISU-122 self-propelled gun's winter camouflage

슈트름게슈쯔 2016. 1. 8. 16:03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의 동절기 위장 채색 - 1944년 




독소전쟁 말기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폴란드 그단스크 시내로 밀고 들어온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 1945년 




독소전쟁 말기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한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 - 1945년 


이   ISU-122 자주포 1943년 우랄지역 첼랴빈스크 키로프 전차 공장에서 생산된 시제형이다.





 ISU-122 자주포에 장착되었던 소련군의 122mm  M1931-37 (A-19) 곡사포 










2000년 봄 헝가리 바자의 마을 입구에서 발굴된 소련군 ISU-122 자주포의

 122mm 포 포신 앞부분의 파괴된 쇳조각과 무한궤도 트랙 조각


독소전쟁 말기 1945년 1월 소련군 ISU-122 자주포 1대는 

헝가리 바자(Bajna)의 남부 마을 인근에서 

독일군 대전차포의 공격에 파괴되었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ISU-122 자주포는 포탑이 없다는 것과 

자주포를 매우 다양한 용도로 써먹는 

소련군의 교리를 빼더라도 IS-2 중전차와 비교을 해도 

나은 점이 많았기에 종전까지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ISU-122 자주포는 IS-2 중전차와는 달리, 152mm포를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차체에 

122mm포룰  장착시켰기 때문에 많은 장점들을 얻게 되었다.

 IS-2 중전차의 포탄 적재량은 28발이었다.

그것도 장탄수가 장전하기 힘든 장소들까지 넣고서 달성한 숫자였다.

그러나 ISU-122는 포탄 30발을 적재하고 있으며, 이 포탄들을 2명의 장탄수가 장전을 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전투지속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고작 2발 많다고 전투지속능력이 높다는 소리를 하는 이유는 

IS-2 중전차는 공간이 좁아서 즉응탄(즉각 응사 포탄)이 몇 발 안되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탄은 장탄수가 전차 내부를 샅살이 뒤져서 꺼내어서 사용 하는 예비탄에 가까웠기 떄문에

 포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예비탄을 꺼내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에 비해 ISU-122는 즉응탄의 숫자도 많고, 예비탄도 IS-2보다는 

꺼내기 쉬운 곳에 있으며  장탄수가 2명이나 되었다. 

이는 실제 전장에서 IS-2 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IS-2에 비해 주포도 안정화장치를 추가하는 등 개량하고, 

전투실이 넓고, 장전수도 1명 더 있기 때문에 주포의 발사속도가 빨랐다. 

그래봐야 ISU-122의 A-19S 주포는 분당 1.5발에서 2.5발 정도의 발사속도를 가졌지만, 

반자동 장전장치를 가진 122mm D-25 주포를 채용한 ISU-122S는 

분당 2발에서 3발까지 발사속도가 증대되었으며 

숙련된 장탄수들이라면 분당 4발까지 가능했다.

 IS-2의 경우 많은 것이 개량된 1944년 형에서는, 더 뛰어난 정확도를 가지고 

순간적으로 분당 6발에 가까운 속도로 사격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1944년 형도 포탄 내부적재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전체적인 전투지원능력은 ISU-122쪽이 더 뛰어났다. 

IS-2가 포탑의 형상 및 주포장착위치의 문제로 인해 하방사격이 

거의 불가능해서 낮은 곳에 위치한 적들에게 당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ISU-122는 상대적으로 주포가 낮은 위치에 장착되어 있어서 하방사격이 가능했다. 

물론 그런 일은 ISU-152도 충분히 해낼 수 있지만, ISU-122가 맹활약을 하던 시기에 

ISU-152의 수효가 적었으며, ISU-152가 본격적으로 투입되던 시점에 ISU-122는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보였기 때문에 소련군은 ISU-122를 종전까지 계속 양산했다. 

ISU-152와 비교했을 때 122의 장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다.

ISU-122 역시 ISU-152가 맡았던 다양한 업무들을 수행하곤 했다.

소련군 ISU-122 자주포의 단점은 ISU-152와 같은 차체를 쓰기 때문에 

ISU-152보다 주포의 화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더 크다. 

하지만 화력의 문제는, ISU-152와 달리 더 빠른 발사속도를 통해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므로  적이 122mm포로 대응 가능한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화력이 완전히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소련군에게 그런 형태의 적은 Tiger-2 전차를 비롯해서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 

ISU-122S가 개발된 후에도 ISU-122 기본형은 계속 생산되었다.

그것은 122mm A-19S 포가 남아돌았기 때문이었다. 

초기 IS-2의 비극적 역사를 쓴 것이나 다름 없는 주포를 계속 사용했으므로 

당연히 장전구조 및 정확도라는 A-19S 야포의 여러가지 문제점도 이어받았다.

 ISU-152나 ISU-122나 설계사상 및 주 임무가 비슷했으므로 

소련군 상부에서 ISU-152와 ISU-122를 굳이 구별하지 않고 

혼성편성해서 부대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선지휘관들은 이런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했던 이유는 차량의  부품이나 탄약공급등 여러가지 면에서 

두가지 차량의 물품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하는 등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ISU-152가 간접사격 모드로 장거리 화력지원을 할때 

ISU-122는 ISU-122에 맞게 별도로 간접사격이 가능하도록 계산을 해주거나

 아니면 간접사격을 완전히 포기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전에 투입된 ISU-122는 122mm이라는 대구경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기 때문에 종전때까지 생산되었으며, 

전후에도 일부 차량이 계속 사용되었다. 

위에 언급된 장점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특히 당초 예상과 달리 152mm포를 장착해야 했던 차량이 

122mm포를 장착시켜 사용하면서  

얻은 정확도 및 발사속도와  즉응탄 문제의 해결로 인해

 소련군은 ISU-122에게 구축전차 업무를 자주 맡겼으며

 IS-2 1944년 형 및 SU-100이 본격적으로 투입되던 시기에도

 많은 ISU-122들이 구축전차 업무를 맡았다는 것에서 

소련군의 ISU-122에 대한 평가가 짐작가능하다.  

여기에 152mm보다 화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고폭탄 성능을 자랑하는 122mm포를 

ISU-152보다 빠른 속도로 더 많이 발사 할 수 있었으므로, 

소련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시가전, 참호전에서 

돌격포로서의 역할도 만족스러울 만큼 해낼 수 있다고 호평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SU-122 자주포는 핀치 히터격이었던 무기였던지라  

독소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살아남은 차량들도 전차 박물관으로 가거나, 로켓 발사대로 개조가 되는 등 

전후에도 많은 숫자가 양산된 T-34/85, SU-100, ISU-152, IS-2 전차와는 

다른 운명에 처해지게 된다. 

 소련군 ISU-122 자주포는 독일군의 야크트 판터 구축전차처럼

 핀치 히터격의 무기로서 나름대로 활약을 한 차량이었다. 







photo from : www.zmne.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