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차 세계대전 WW1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 가브릴로 프린치프 - World War 1 Fuse wire Gavrilo Princip

슈트름게슈쯔 2016. 8. 16. 02:35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1863 ~1914)



사라예보의 총성 - 역사적 사건의 발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893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시녀였던 조피 호테크 폰 콧구바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피는 리히텐슈타인 공작, 바덴 대공, 호엔촐레른헤힝겐 공작등과 직계 조상이 동일하였지만

 일개 백작의 딸이었기에 그의 백부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 와의 혼인을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그녀가 아니면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1900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고 혼인에 합의했다. 

조피 호테크 폰 콧구바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작위를 공유하지 않는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오스트리아의 황자(공주), 헝가리의 왕자(공주), 

오스트리아의 대공(여대공)등의 작위를 받을 수 없으며, 계승권도 가지지않는다. 

대신 호엔베르크 공자(공녀)의 직위를 얻는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이 조건에 동의했고, 1900년 7월 1일 조피와 결혼했다. 

조피는 결혼과 동시에 호엔베르크 여후작의 직위를 받았으며 

1909년에 호엔베르크 여공작으로 승격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한층 더 조카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14년이 흘러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던 1914년 6월 28일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와 함께 군대를 사열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열차를 타고 도착한 대공 부부는 보스니아의 지사였던 오스카 포티오레크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오전 10시를 조금 지난 시각 대공 부부가 탑승한 차량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던 중 1차적으로 폭탄 테러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포티오레크의 시종무관인 메리지 중령을 비롯해 

부관 두 사람이 부상을 당했지만 대공 부부는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차를 세워 상황을 확인한 뒤 다시 출발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측근들은 일정을 중지할 것을 권유했으나 

보스니아 지사 포티오레크는 폭탄 테러는 단독범의 소행이며 

추가적인 암살 시도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10시 45분, 시청에서의 환영 인사를 마친 대공 부부는 아까의 사건으로 다친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는데 일정이 운전사에게 전달되지 못해 

앞서가던 차 두 대가 본래 가기로 했던 대성당으로 향했다.[

보스니아 지사 포티오레크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했고, 운전사가 차를 돌리려는 순간 

저격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쏜 첫 번째 총알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에 맞았고, 두 번째 총알은 조피의 배에 맞았다.

동승했던 하라흐 백작은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죽어가는 조피에게 "조피! 죽으면 안돼!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만 해!" 하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피격이 있은 지 몇 분 뒤, 포티오레크는 사건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11시 30분 전보를 전해 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동요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의 시신은 다음날 빈으로 옮겨졌고 

포티오레는 사건의 책임자로 비판을 받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를 감싸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한다.





1차 세계대전 발발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夫妻)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 1894~1918)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던 인물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1914년 당시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이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당시 우파 성향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결사대 [검은 손]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그중 카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하여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살해했다,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夫妻) 를 암살한 사건이 터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한달 동안 세르비아 정부와 의회는 러시아의 후원을 기대하고 망설인다.

이후 세르비아는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같은 슬라브 국가이며 

후견국이기도 했던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를 해제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여 독일의 선전포고를 받게된다. 

독일은 1914년 8월 2일 러시아가 세르비아 지원을 위해서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삼국 동맹에 의거하여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결국 세르비아의 19세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자행한 사라예보 페르디난트 대공부처를 암살사건으로 인해 

범슬라브 세력을 응징하기 위한 범게르만 세력 결집의

빌미를 독일에게 제공하게 되어 유럽및 아시아와 나중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하여 

미국까지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프린치프는 재판을 거쳐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감옥에서 2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photo from : Marina Amar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