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요제프 멩겔레와 이시이 시로 731부대의 생체실험-Nazi Germany Josef Mengele & Japanese Shiro ishii unit 731 an atrocity Human Sunject Research

슈트름게슈쯔 2017. 1. 29. 12:39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 1911~1979)

 

 

2차 세계대전 당시 요제프 멩겔레는 나치 독일 친위대(SS)의 장교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 의사였다.

그는 수용소로 실려온 수감자들 중 어떤자를 죽이고

어떤자를 강제 노역에 동원 시킬지에 대한 결정을 내렸으며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였던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러했던 그의 별명은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로 알려져 있다. 

 

  



 

멩겔레의 생체 실험에 이용되었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 어린이들


 

1943년 멩겔레는 병에 걸린 전임의사 대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로 배정되었다.

1943년 5월 24일 멩겔레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집시 캠프' 의무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간 이후 캠프가 해체되면서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이 되었다.

 당시 아우슈비츠의 주임 의무관은 그의 상관 에두아르드 비르츠(Eduard Wirths)였다.

수용소에서 머문 21개월간 그는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다른 의무관과 교대로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과 강제 노역에 동원할 유태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멩겔레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수감자들을 이용하여 그의 유전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는 특히 쌍둥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이들을 선별하여 특별 병영에 따로 수용하였다.

멩겔레는 또한 집시 캠프에 있었던 시절 발병하여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수암(Noma)이라는 질병을 연구하였으며,

수암의 원인은 밝혀내지 못하였지만 이 질병이 영양실조 등으로 면역체계가

무너진 아이들에게 주로 발병하여 홍역과 결핵 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멩겔레는 수암이 인종적 열성요소 때문에 발병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멩겔레에게

 

실험용으로 이용되었던 난장이 곡예사 Ovitz

 

 

멩겔레는 수용소에 도착한 수감자들 중 기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오비츠(Ovitz)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예술가 가족인 이들은 열 명의 가족 중 7명이 난쟁이였으며,

 끌려오기 전에는 릴리풋 곡예단(Lilliput Troupe)이라는 이름으로 동유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하였다.

 멩겔레는 이들을 종종 '나의 난쟁이 가족'이라고 부르며 아꼈다.

멩겔레의 실험들은 과학적 가치가 모호한 것들이 많았는데,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해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이나

마취 없는 늑골 적출, 기타 잔인한 외과 실험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멩겔레의 수집품이 되었다.

레나 겔리센(Rena Gelissen)이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동안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 10월월경 멩겔레는 여자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멩겔레는 특별 작업을 할 사람을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여자 수감자들을 선택하였으며,

 이를 중노동에서 해방될 기회로 생각한 여자 수감자들은 멩겔레에게 끌려가

불임 수술과 충격 요법 등을 받았고, 대부분 실험 또는 사후 감염 등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았다.

헝가리에서 끌려온 유태인 의사 니슬리 미클로시 (Nyiszli Miklos)는 법의학과 독일어를 공부한 덕에

멩겔레에게 선발되어 그의 조수로 일하였으며, 훗날 멩겔레의 실험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멩겔레의 실험 대상이 된 이들은 일반 수감자들보다

나은 주거 환경에서 보다 좋은 음식을 먹었으며 가스실에 갈 위험도 없었지만

멩겔레는 이들을 실험 재료로 생각하였을 뿐 결코 이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다.

멩겔레는 필요에 따라 이들을 간단히 살해하고 해부용으로 사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로 도주하여 숨어 버린 요제프 멩겔레의 현상수배 전단 






 


 

방독 복장으로 생체 실험을 하는 일본 731부대 요원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인간을 공급하여 전쟁의 대량 살상용 실험의 소재로 삼아

여러가지 생체실험과 세균실험을 벌였던 731부대라는 특수 부대를 만들었다.

이 731부대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였다.

일본 731부대의 잔혹한 생체 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과 만주인 조선인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러시아과 유럽인및 미국인도 있었다

 

 


 

만주 하얼빈에 소재했던 일본  731부대의 실험실

 

 

일본 731부대는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소속의 비밀 생물학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에 있었던 부대이다.

1932년에  설립하였고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동향부대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731 부대'로 개명을 하였다.

731부대는 중일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 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에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을 강제로 잡아서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자행하였다.

 일본 요원들은 인간을 생체 실험용으로 이용하여 희대의 악명 높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731부대는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731부대의  원래 목적은 태평양전쟁 전 정치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일본군의 사상및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731부대는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731 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였으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이 그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인류에게 악명 높았던 범죄를 자행했던 일본의 731 부대는 중국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되었다.

731 부대는 일본의 정치적 선전, 일본 군대의 사상적 대표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정치 선동에 대항해 일했으나 나중에 그 영역이 확대되었고,

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731 부대는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같은 정치 선동 부서이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 인종주의 이론, 방첩 활동, 정보 활동, 정치적 사보타주,

적 전선 침투 등에 관한 활동을 하였다.

731부대는 만주 헌병대, 만주 정보기관, 만주 정규 경찰, 만주 거류민 위원회,

지역 만주 민족주의 정당, 일본 비밀 정보기관과 긴밀히 연락했다.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 1892~1959)


이시이 시로는 일본의 군인으로 731부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일전쟁 중 일본 제국 군대의 생물학전을 담당했다. 

 이시이는 지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 제국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기적이고 뻔뻔하며 방해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지만 학업에서는 뛰어난 편을 보였다. 

1922년 육군병원과 도쿄의 육군의학교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작업은 윗사람들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2년 뒤에 대학원 후 과정으로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돌아왔다.  

그 후 이시이 시로는 유럽에서 유학을 하면서 값싸고 저렴하며 

강력한 전쟁 무기가 세균 무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국 하얼빈에 일왕 직속으로 세균전 부대를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나 '전염병 예방 연구소' 등의 이름으로 

위장하기도 하고 '동향부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731부대'로 개명하고 잔혹한 생체실험을 통해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다.  

전쟁 이후 그는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주일미군과 생체실험자료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67세에 식도암으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전쟁 이후 그는 일본에서 실험용 생쥐 농장을 차리고 매춘업도 병행했다. 

그를 따르던 부하 군의관들은 미도리주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이시이 시로 중장은 키가 180cm나 되는 거인이었으며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전체수석을 할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다. 

또한 시골에서 농사짓던 형제들을 불러다 자신의 부대의 고등관으로 복무시켰으며 

조카 이시이 나가데에게는 대위의 계급으로서 판임관의 신분을 부여하고 

마루타를 공급하는 부서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시이 나가데는 싸움을 상당히 잘했으며 

특히 검도실력이 관동군 전체 최강이라 묘사되었다.



 

 

 


 731부대의 이페릿 독제 실험으로 얼굴에 화상을 입고 사망한 서양 여성

 

 


 

서양 여성들에 대한 일본 731부대 요원의 해부 실험

 

 

731 부대의 만주에 있는 부문에서는 백러시아인,중국인,만주인,몽골인과

기타 특수 부서, 비밀 부서 경력의 외국인을 활용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및 몽골인과 러시아인들이 이 부대의 실험 대상이었다.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가 731부대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이 부대에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에 의해 연구된

생물학 무기의 사용으로 수만 명의 중국인 들이 목숨을 잃었다.

731부대는 일제가 세운 생물학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齊齊哈爾), 543부대(하이라얼 시, 海拉尔),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長春),

1644부대(난징 南京), 1855부대(베이징 北京), 8604부대(광저우, 廣州), 200부대(만주),

9420부대(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를 하였다.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의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을 전부 소개하고

지역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무기를 실험한 사례등 인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사례까지 알려져 있는 등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 시 열차의 차양막을 모두 내려야 했었고

부대의 인근지역을 차창밖으로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에 매우 철저할수 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 부대의 활동은 국제연합에 의해 전쟁 범죄로 선포되었다.

 

 

 

 

 

 


 

photo from : japonia.pinger.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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