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일본 육군 헌병대 켐페이타이와 일본 경찰 순사 - Imperial Japanese Military Police Kempeitai & Japanese Civil Police Junsa

슈트름게슈쯔 2017. 4. 9. 16:12



중일전쟁 당시 만주 열차속의 일본 육군 헌병대(켐페이타이)의 켄페이(헌병)들- 1935년 1월  




중일전쟁 당시 침략한 중국의 일본 육군 헌병 켄페이 - 1937년 



중일전쟁및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헌병대는 편제상 

일본 육군 소속으로서  일반 치안 업무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일본군 헌병은 국가 헌병대를 두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인

 프랑스의 국가 헌병대 제도를 참고하여 제작되었다.

그 때문에 같은 육군 내에서도 별개의 군처럼 행동했고, 

식민지 및 내국 민간인 뿐 아니라 육해군들에게도 악명이 높았다. 

그러한 이유로 헌병대가 민간인을 체포, 고문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인들에게는 일제강점기 당시 허리에 칼을 찬 일본군 헌병들과 

일본 순사의 이미지가 영화와 드라마등에 지속적으로 등장되면서

가장 인상깊은 형태의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일본군 헌병은1881년, 일본 육군이 프랑스군의 헌병제도를 모방하여 

헌병조례를 제정하며 헌병을 설치한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켄페이(憲兵, けんぺい, Kenpei)'라고 부르며, 

그 당시 워낙에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았던 존재들인지라

 영어권에서 일본 육군 헌병대를 일컫는 단어는

  켐페이타이(Kempeitai)로 고유명사로 정착되었다.

 일본 육군 헌병대는 모델이 된 프랑스 국가 헌병대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국가 헌병대와는 달리 따로 독립적인 하나의 군종을 구성하지 않고 

육군 산하의 조직으로서 편성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및 식민지에서는 육군성의 지휘를 받고 

일본 본토 내에서는 내무성(현재의 총무성)의 지휘를 받는 등

 타국의 국가 헌병대와 어느 정도 유사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또한 육군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랫 동안 따로 헌병을 두지 않았던 

일본군 해군과 관련된 헌병업무도 수행하는 등 그 활동범위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군종을 형성하고 있는 타국의 국가 헌병대와 비슷한 면을 보였다.

 이들 일본군 헌병은 독특하게도 국가 헌병대로서의 역할 외에도 

방첩기관 내지는 정치경찰로서의 업무도 수행했다.

그에 따라서 정치사찰과 해외공작 및 첩보 등도 담당하는 등 정보기관으로서도 활동했다. 

나치 독일과 비교해 보면 나치 독일 비밀경찰이었던 게슈타포에 준하는 위치였으며, 

몇몇 분야에는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보다도 개입라는 범위가 넓었다. 

일본군 헌병의 계급은 상등병부터 시작했고 월급도 매우 좋았다. 

그러나 하사관 및 장교들의 승진은 상당히 어려웠다. 

1910년대 조선의 일제강점기 시기 초반기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시절 

일본 헌병은 일반 경찰 업무의 상당부분을 담당했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연합국 민간인 성직자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로 미군에 의해 

우라와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4명의 일본 악질 순사(준사巡査)들 - 1945년 8월 30일 




1945년 8월 30일 일본 도쿄의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져 위치한 

사이타마 현 가미키자키 5-6-3 우라와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미국 해군과 해병대 장교는 수감자들의 해방 축하를 무시하고 4명의 일본인 악질 경찰 순사들을 수감시켰다. 

미군 장교의 왼쪽 눈 밑에 흉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근 태평양 전쟁중 상처를 입은것 같았다.

우라와 (Urawa) 포로수용소는 1942년 스파이 활동을 방지및 차단시키기 위해 수감된 남성 선교사들과

 성직자들을 주로 수용하는 수용소로서 다른 포로 수용소나 민간인 수용소보다는 환경이 나은 상태였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일본 육군 헌병대 켐페이타이가 운용하는 대부분의 다른 포로 수용소와 비숫한 수준일수도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라와 포로수용 성직자 수감자들과 일본 시민 경찰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매우 나빳다. 

1945년 9월 4일 미국 로스엔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Times) 지의 보도를 인용하자면

우라와 (Urawa) 포로 소용소의 수감자였던 

마리 가브리엘 그롤로(Marie Gabriel Groleau :1913~ 2000)씨는 

그 경찰, 

아, 그 경찰! 

그들은 악질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발로 차고 모두에게 가혹하게 폭행을 가하며 때렸다. 라고 했다.

 증언자 카라 파머 씨는 그의 글에서 우라와 포로 수용소의 일본 경찰들은 수용소에 

배급된 음식 대부분을 빼돌려 자기들끼리 배를 채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그 곳에 있을 때 수감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모두 야위고 창백했던 얼굴의 

모습과는 반대로 우라와 포로수용소의 어떤 몇명의 순시 경찰들은 

얼굴에 살이 찐 둥그스럼한 형태의 얼글 모습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일본 시민 경찰 (경찰국)은 그들이 수집한 사건 내용들을 모두 일본 내무부에 보고했다. 

일본 시민 경찰 (경찰국)조직은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에 의해

 해산되지 않은 일본 정부 소수의 조직 중 하나였다. 

연합군 전략 서비스국 (OSS)의 기각된 한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 공무원의 낮은 임금 수준에도 불구하고 일본 시민 경찰의 임금은 극도로 빈약한 수준이다.

 그러한 저임금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존엄과 중요성에 의해 보상 될 수 있지만 

일본의 경찰관은 경찰이라는 직업에 이끌린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보통 수준의 능력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 이하의 형태였다.

전쟁은 전선으로 징병 가능한 일본인 남자들의 수를 심각하게 줄어들게 만들어버려

 그에 따른 인적 수준을 더욱 낮추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들중 많은 수의 사람들 상태는 전쟁중에 입었던 부상에서 벗어나 회복 중이었거나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제네바 협정에 따른 국제적 규약을 기초로 한 

기본적인 형태로 포로들의 수감 관리를 할수 있는 능력이 없는자들 이었고 

일본 시민 경찰의 업무에 결코 해당되지 않는 수준의 일본군 재향 군인들이었다.





 1950년 6월 26일 북한 공산군대의 한국 침략 6.25 전쟁 발발 다음날 

맥아더 원수의 명령에 따라 일본 공산당 본부를 폐쇄시키는 

일본 경찰청 순사(준사巡査)들 - 1950년 6월 26일


일본 경찰은 도쿄에서 1950년 6월 26일 도쿄에서 공산당 신문을 30일 동안 폐쇄했다. 

맥아더 대변인은 일본 공산당 신문이 한국 상황에 대한 진실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photo from : Flashb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