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중국의 작두 공개 처형 -Chinese Straw cutter public execution of Enermy

슈트름게슈쯔 2017. 7. 11. 09:54



상의를 모두 벗기우고 양팔과 양손이 뒤로 결박 당한 채 공개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자들과 

작두 처형시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옷에 묻히지 않기 위해 도살장 망나니들이 

도살 작업시 입는 가죽 앞치마를 걸치고 작두 공개 처형에 대기한 도살수들




  1명의 작두처형에 도살수 4명이 달려들어 

2명은 발버둥치는 저항군 대원의 다리를 붙잡고 1명은 몸통을 누르고 

1명은 작두로 목을 절단시키는 공개처형 장면의 사진 




공개 처형후 목이 절단된 동료의 끔찍한 사체를 

곁에서 선체로 바라보는 자와 처형된 자의 

사체를 작두 단두대 밖으로 끌어내는 도살수들 


장소와 년대및 날짜 미상인 작두 공개 처형 자료 



이 사진들은 정확한 장소와 년대가 미상인 사진으로 한국의 서적 어문각판 일제의 침략등에서 

그 동안 일제가 만주 등지에서 조선인에게 저지른 학살로 알려져 왔으나 

후일 중국 만주 군벌군이 비적떼의 붙잡힌 자들을  본보기로 

작두 공개 처형 시키는 사진으로 밝혀 졌다.


일본군에 의한 독립 투사 작두 처형 장면으로 보도되었던 사진 - 신아일보 1977년 2월 28일




위의 자료들은 도서출판 [어문각]에서 일제의 침략 당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 대한 학살과 온갖 만행의 
생생한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놓은 [일제의 침략]이란 서적에 나와 있는 사진들이다.
필자 또한 [일제의 침략]이라는 서적을 1985년경  

20대 초반에 구입하여 보았고 그 이후로도 한번씩 다시 보았었다.
그 책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의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는데 일본제국주의가
조선과 중국침략했던 당시의 상황을 그나마 명확한 사진 자료를 통해 각 사진마다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3.1 만세 운동당시 조선인들에게 가한 끔찍한 살상과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고 집중사격을 가하여 학살한 
수원 제암리 양민 학살사건과 청산리 전투이후 그 주변지역 양민들을 본보기로 학살하는 장면및
일본군들이 중국 침략시 점령지 곳곳에서 사람의 머리를 효수한 사진들이나 
대량 양민학살로 잘알려져 있는 난징 학살사건 당시 총검으로 양민들을 학살하다 못해 
나중에는 심지어 구덩이를 파놓고 산사람을 그대로 생매장시키는 장면등 
일제가 조선과 중국에서 저지른  천인공노할 그 만행들을 보다 보면 
그 당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도 느꼈듯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이 일제에 당하며 겪어야 했던 고통과 울분을 되새기며
일제의 잔학함을 다시 한번 느꼈고 그 당시를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볼수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그런데 위에 게시한 4장의 사진들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자세히 눈여겨 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서적에는 작두처형을 하는 사진에 대하여는 그 현장의 지명을 소개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일본군이 작두로 조선인을 공개 처형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다.
사진들을 자세히 보면서 처형을 당하는 저사람들이 

과연 조선인들일까 하는 의문점도 가져볼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장이 제법 큰 군인들이 

과연 일본군이 맞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 보았다.
작두로 사람을 공개 처형하는 장소에 놓인 작은 상과 
들판의 평지에 처형 장면을 보기위해서 모여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나무등을
보면 저곳이 과연 당시 한반도 지역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했던 의문은 오랜 세월이 지난후 2011년에서야 비로소 풀렸다.
위의 저 사진들은 현재에도 일제의 만행을 담아 대형 사진으로 공개하는 역사 자료관이나 
인터넷상에 일제의 잔혹성에 대한 역사 사진 게시물을 소개하는 
여러 블로그들에는 아직까지 저 사진들이 

일본군들이 조선의 독립투사들에게 자행한 작두처형이라고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작두 처형의 사진들은 일제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함은 위의 자료에 나와 있는 장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았다고 본다.
그러한 자료들을 같이 게시할수도 있지만 작두 처형에 대한 오보를 되짚어 보는 것이 주제인지라 
굳이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들에 저지른 잔학한 장면은 올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오보의 내용을 인터넷에 게시했던 [사진이 다 말해주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전민조씨의 글을 옮겨본다. 


언론사는 충격적인 사진을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보도하는데만 급급했다.
'작두처형'의 첫 보도는 1977년 2월 28일 신아일보에서 시작되었다.
사진 내용은 독자 유승렬씨가 제보한 사진으로 일제시대 일본 군인들이 
울산부근에서 독립투사들을 '작두처형'하는 장면으로 보도 되었다.
당시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독립투사를 작두로 처참하게 처형하다니'
도대체 일본군은 용서 못할 인간들이다 라고 분노했다.

20년 후에는 또 다시 창간되는 '기호일보'라는 신문에서 1992년 2월 29일
똑같은 사진을 보도했다.
'기호일보'에서 보도된 "작두처형"사진을 
세계일보,한겨레신문,조선일보,경향신문,중앙일보에서 연달아 보도되었다.

한번도 아니고 몸서리쳐지는 충격적인 사진을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혐오스런 지겨운 사진이었다.
언론사중에 동아일보,한국일보,국민일보 3개사만 희안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3개사는 기호일보는 첫보도라고 했지만 첫보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작두처형을하는 군인들이 일본인인지,중국인인지 확인을 하고 보도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 이낙연 주일특파원(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은
1992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작두처형에 대하여
"일본군"이 독립투사들을 처형하는것이 아니라 중국의 장학량군이나
중국 국민당 군인들의 소행으로 도둑질을 일삼는 비적처형(匪賊處刑)장면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아울러 시부야대학 해외사정연구소 다테무네요시 교수의 말을 인용해서

1, 군장,장비등 사형집행 방법에서 차이가 있고 작두처형하는
집행인복장이 중국병사라고 할수있다.

2,중국 군인의 군모(軍帽)테두리는 푸른 바탕에 12줄 무광선 하얀 태양을 새겨넣은
청천백일기(靑天百日旗)의 백색이지만 일본의 군모(軍帽)는 별이었다.

3,총탄을 휴대하는 탄대도 중국군은 흰색의 탄대였지만 일본군은 당시 "상자형"이었다.
다리에 감는 복장도 일본은 각반이었지만 중국군은 발목에 흰색양말을 신었다.

4,중국 병사들은 대도(大刀) 다다오를 들고있지만 일본군의 장교는
대도(大刀)다다오가 아닌 군도(軍刀),일본군은 총검(銃劒)을 휴대했다.

5,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은 완장을 차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전투할때도 
완장을 차지 않았으며 일본 헌병의 완장도 선(線)이 들어 있지 않았다.


결국 작두처형 사진은 국내신문의 완전한 오보(誤報)였다.
중국 군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도둑질이나 일삼는 무리들을 공개처형하는 사진을
가지고 있던 소장자가 언론사에 슬그머니 사진을 내놓고 언론사는
검증도 하지 않고 세상에 무조건 터뜨린 셈이었다.

문제는 정체 불명의 사진을 국내에서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평가를 내리는 전문기관이 없다는 점이다.

출처도 불분명한 사진을 가지고 폭로주의에 빠진 언론에 제보만 하면
중국군인지 일본군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막 터뜨리고 있으므로 그런 심리를
사진 소장가가 노렸는지도 모른다.

터뜨리고보니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진 
상업적 폭로가 더 이상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다. 
결국 작두처형은 일본군으로 잘못 알고 있다가 
중국군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대상이 바뀌면서 너무나 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