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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기 주한 미군 M 46 패튼 전차의 사격 훈련 - USFK M 46 Patton Tank gunnery exercise during the Cold War

슈트름게슈쯔 2018. 7. 21. 17:28














냉전시기 경기도 북부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 주한 미군 캠프 카이저 기지

 M 46 패튼 전차 대대의 사격 훈련  - 1957년 9월 


포천의 주한 미군 캠프 카이저 기지는 1966년에 폐쇄되었고 

1970년 11월 14일 한국에 반환되었다.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닉슨 독트린은 여러 내용을 담고 있지만, ‘국가 방위의 1차적 책임은 

각 국가가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과 ‘아시아에서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가급적 피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미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겠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그에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은 닉슨 독트린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대신 미국은 ‘스스로 도울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으로서도 닉슨 독트린은 청천벽력이었다. 

물론 미국이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겠다”는 

단서를 단 만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국의 안보 지원은 여전히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닉스 독트린의 성격상 미국의 안보 지원 강도가 

과거보다 약해지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더구나 베트남전 참전으로 미국을 적극 지원한 만큼 

한미 안보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기를 기대했던 

한국 지도부에게 닉슨 독트린은 ‘예상하지 못한 돌출적인 변수’였다. 

그럼에도 한국 지도부는 정세 변화에 냉정하게 반응했다.



1970년 초부터 미국은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감축이 한국 정부에 처음으로 공식 통보된 것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지 1년여가 지난 1970년 7월 5일께였다.

 그날 포터 주한 미 대사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주한미군 감축을 통보했다. 

1954년을 전후해 이뤄진 주한미군 1차 감축 이후 16년 만에 

한국 주둔 미군 규모를 대대적으로 줄이는 

주한미군 2차 감축 문제가 그렇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미간에 협의가 진행되고 있던 1970년 10월 15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미 7사단 1여단이 주둔하고 있던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의 

캠프 카이저를 폐쇄하겠다고 공개 발표했다.

 폐쇄 시한은 불과 한 달 뒤인 11월 15일이었다. 

한미 간의 협의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미국의 발표는 당시 한국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미 미군이 교대 병력을 충원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미 7사단 소속 병력 중 일부를 이미 줄였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 같은 우여곡절 끝에 큰 틀에서 미 7사단 철수에 따른 

한미 간의 합의가 끝난 것은 1971년 2월 6일이었다. 

양국은 그해 6월 말까지 미 7사단을 철수시키는 등

 주한미군 1만8000여 명을 감축한다는 것과 

서부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던 미 2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켜, 

휴전선 방어 임무는 한국군이 전담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아울러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하고 그에 따라 최대 15억 달러의

 군사원조·차관을 제공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합의가 이뤄진 지 이틀 후인 2월 8일

 “스스로 돕고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자조·자립·자위의 정신이 박약한 민족은

 언제나 남의 침략을 당해 수난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기록이므로, 

정부와 국민이 일치단결해 자주국방의 정신을 

더욱 굳건히 살려나가자”고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당시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 소장은 “미 7사단의 철수 결정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신념을 강화시키게 만든 

출발점 중 하나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