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중 거제 포로수용소 공산 포로들의 폭동 방화- The rioting arson of Communist prisoners in the Geoje prison camp Korean War

슈트름게슈쯔 2018. 9. 17. 23:38











한국 6.25 전쟁중 거제 포로수용소 공산 포로들의 폭동에 의한 방화 - 1952년 5월 7일 







한국 6.25 전쟁중 1951년 6월까지 거제 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산군 포로 15만명과 

중공군 포로 2만명 그리고 여성 포로 300명을 포함하여최대 15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

  1952년 5월 7일 거제 포로수용소 소장이었던 Francis Dodd 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 7일 제 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Francis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유엔군의 포로 교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포로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자유송환을 유엔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년 11울 27일 부터 유엔군에 의해 거제도 일대에 총면적 12 ㎢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Ridgway)의 뒤를 이어 새로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Boatner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던중  6월 7~10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을 일으켰다.  

보트너(Boatner)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6월 10일 도드(F. Dodd) 소장은 구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