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tish Tank

말타섬의 멜론 무늬 위장색 마틸다 2 MK2 그리핀 전차 UK Army melon pattern camouflage painted Matilda 2 MK 2 griffin Tank in the Malta Island

슈트름게슈쯔 2018. 10. 18. 23:35




제 2차 세계대전시 영국군의 지중해 전략적 주요 거점 말타섬

 멜론 무늬 위장색 마틸다 2 MK2 그리핀 전차 - 1942년 






 대실 해미트의 장편소설 말타의 매의 제목에 나타나는 지명이자  

소형 애완견 말티즈의 원산인 말타섬은 지중해에 있는 섬이다.

이 말타섬은 고대에는 로마 제국의 통치를 거쳐 5세기 로마제국이 붕괴된 뒤 

사라센 해적들의 압제에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섬이었다.

 1522년에 오스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말타 섬에 자리잡고 있던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이자 에스파냐 왕인 카를로스 1세(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 1마리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말타섬을 사실상 무상증여했다.

이 때부터 말타섬은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약 300년 가까이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말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은 기사단원들은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한눈에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들이 자리잡았던 말타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엇다.

그러했던 관계로 말타섬은 오스만 제국에게 엄청나게 골치를 썩였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말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명(최대 4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술리이만 1세는 석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말타섬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00~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정도였다.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을 단숨에 전유럽에 떨쳐, 몰타의 지명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말타 공방전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과 교황청을 위시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대상으로 더욱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말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가, 

19세기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가는 과정에서 기사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점령 직후 기사단은 말타에서 퇴거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말타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빈 회의(1814~1815)의 결과 말타의 영국 영유가 승인되어 말타섬은 영국 해외령이 되었다.

두 번째로 갈 곳을 잃은 기사단은 결국 교황청이 받아준 로마로 망명했다.

이 때부터 그들은 무력을 이용한 사업을 포기하고 본업인 구호 사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이후 말타는 별 문제 없이 영국령으로 남았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말타섬은 일약 그 중요성이 급증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 원정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루트 또한 더불어 매우 중요해졌다.

말타섬의 위치는 남북으로 시칠리아-트리폴리의 독일군, 이탈리아군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고, 

동서로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라는 영국의 보급선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타를 점령하는 쪽이 자신의 보급로를 확보하고 

반대편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이 때문에 추축군은 엄청난 공군력을 쏟아부어 말타를 폭격했다. 

영국은 영국대로 본토를 제외하면 최초로 말타섬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주둔시키는 등 계속해서 말타섬 기지에 전력을 증강시켰다.

그러한 영국군의 군비 증강으로 인해 독일은 말타를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다. 

물론 큰 피해를 감수하고 처리할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 주축이 될 

독일군 공수부대가 크레타 섬에서 엄청난 피해를 내고 성공 아닌 성공을 거뒀기에 

효용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곳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말타 섬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는 2차 세계대전 전사 속의 짤막한 문장으로 바로 파악할 수 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으로 가는 보급품의 9할에 가까운 물자가 

말타에 주둔한 영국 해군을 주축으로 한 포위망에 의해 격침당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말타는 1964년 영연방 왕국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1974년 말타 공화국이 되었다. 

 2004년에는 말타 독립 40주년을 맞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1989년  말타에서 냉전의 종말을 기정사실화한 말타 미-소 정상회담이 열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