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한국의 독립문 - Dongnimmun (Independence Gate) Seoul KOREA 1957~1972

슈트름게슈쯔 2019. 3. 1. 12:25



한국 서울의 독립문-1957년 2월 22일




한국 서울의 독립문-1963년 





한국 서울의 독립문-1970년 




한국 서울의 독립문-1971년 




한국 서울의 독립문-1972년 



독립문은 일제가 아닌 중국 청나라에게서의 독립 상징이었다.


한국의 서울 독립문(獨立門)은 조선 후기 대한제국의 건축물로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에 완공되었다. 

이 건축물은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지은 문으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서재필은 프랑스 에뜨왈 개선문을 원작 배경으로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사파진), 

Sabatin, 흔히 사바틴)이 설계·시공했고, 현판 글자는 매국노로 잘 알려진 이완용이 썻다는 설과 

조선의 명필로 잘 알려진 김가진이 썻다는 설이 분분하여 그 진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독립문(獨立門)은 조선의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뒷편에 건립되었다.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돌이 함께 남아 있다.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영은'이란 단어는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라는 단어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소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대한 반감에 더해졌다.

 예전부터 발해와 고려, 조선을 형님의 나라이며 상국으로 받들던 여진족에 대한 멸시 등이 복합되어 

반청 감정은 고조되었고, 북벌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19세기까지 이어졌고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에따라 1890년대에 조선의 선지자 중의 한명이었던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모양새를 직접 스케치했다. 

이는 1896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에게 보내졌다.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게재한 자신의 논평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독립신문에 게재한 서재필의 논평 - 1896년 7월 4일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맑은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왔다.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한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된 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에 공사를 시작해 1897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그때까지 친미파였던 이완용과 김가진 둘중 한명이 썻을 것으로 사료되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인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독립문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 16년 말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10.26 사태가 일어나기 3개월전 

 1979년 7월 13일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다.

그로부터 30년후 이명박 대통령 정권 2년 시절이었던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동시에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임금이 나가 맞았던 문이었던 

 영은문 바로 앞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독립문 건립에 필요한 비용은 약 3825원으로 책정됐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이런 뜻을 알리고 국민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이후 각계각층의 국민들은 독립협회의 목적을 지지하고 성금을 자발적으로 헌납했다. 

1897년 8월까지 5897원19전2리의 성금이 모였다. 

독립협회는 이 성금으로 독립문 건립뿐만 아니라 독립관과 독립공원 건립도 추진했다. 

공사 도중 비용이 부족해지자 다시 국민들의 자발적 헌납이 이뤄지기도 했다. 

당시 공사 총괄은 유명한 건축기사였던 한국인 심의석이었다. 

그리고 석재의 가공은 한국의 고급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육체적 노동과 관련한 일은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당시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이를 두고 자신의 일기에 

‘역사의 영고성쇠(개인이나 사회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뒤바뀌는 현상)’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독립문을 세우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독립공원은 막대한 경비 소요로 인해 계획대로 개설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환영과 송별연을 베풀어주던

 모화관을 개수해 독립관이라 이름 지었다. 

이 독립관은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됐



후일 독립문 제작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출신과 관련해서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

후일 스위스인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국제한국사학회 공동 연구자의 한사람인 러시아 국립인문과학대학 타치아나 심비르체바 박사는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따라서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한 대목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