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군의 미국 본토 공격용 비밀 병기였던 풍선 폭탄 - Mainland USA attack by Imperial Japanese Army Secret Weapon balloon bomb

슈트름게슈쯔 2019. 5. 17. 21:28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제작하여 북미 대륙으로 날렸던 풍선 폭탄 


위의 일본 풍선 폭탄은 1945년 캐나다 사스캐치완주 밀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캐나다 전쟁 박물관에 전시된 일본 풍선 폭탄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국가 삼림 대원들이 모나시 산맥에서 발굴한 것으로 추정된다. 

캐나다 육군 군사 폭탄 처리부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벤쿠버에서 북동쪽으로 460km 떨어진 

룸비 근처의 숲에 있던 일본 풍선 폭탄의 금속 물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타와 군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의 풍선 폭탄 - 2013년 8월 11일 




캐나다 브리티시 컬럽비아주 시드니의 항공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본군 풍선 폭탄  - 2019년 1월 29일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상공에 출현했던 일본군의 풍선 폭탄 - 1945년 2월 


위의 일본군 풍선 폭탄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상공에서 미 육군 항공대 P-40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의해 격추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과 3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빅토리아 근처의 파트리샤 만에서 작전중이던 

 캐나다 왕립 공군(RCAF)소속 133 항공대의  전투기 파일럿은 일본군 풍선 폭탄 2개를 발견하여

 기총 소사를 가하여 파괴시켰다. 

1945년 3월 10일 전투기 파일럿 J. O. 패튼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솔트스프링 아일랜드 근처에서 출현한 다른 일본군 풍선 폭탄을 파괴 시켰다. 

또 다른 일본군 풍선 폭탄들은 미국 오리건주와 캔자스주와 몬타나주와 애리조나주와 캘리포니아주및 

캐나다 서스캐처완주와 노스웨스트 테리토리주 및 유콘 테리토리 지역 등지에서 수백개가 발견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국 캔자스주에 떨어진 일본군의 풍선 폭탄 - 1945년 2월 23일 





미국 오리건주에 떨어진 일본군의 풍선 폭탄 - 1945년 2월 23일 




미국 오리건주 클라만스(Klamath)에 떨어진 일본군의 풍선 폭탄 - 1945년 5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벤쿠버 남부 트와센 반도 포인트 로버츠 근처 해변에 떨어진 

일본군의 풍선 폭탄 -1945년 5월 18일 




태평양전쟁 말기 제트 기류를 이용한 일본군 풍선 폭탄의 미국 본토 공격 이동 경로 




제 2차 세계대전 중반기였던 1943년 일본은 본토에서 미국 본토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방법끝에 궁리해낸 것이 바로 풍선 폭탄이었다. 

그것은 이름이 풍선 폭탄이지만 무인기구를 이용한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은 무인 폭탄 V1과 V2 로켓을 개발하여 영국 본토로 날려 보냈지만 

일본은 제트 기관이나 액체 연료  로켓이 아닌 수소 풍선 기구 폭탄을 만들어 미국 본토로 날려보냈던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이미 지구 대기권 제트 기류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소를 주입시킨 풍선 폭탄들을 일본 상공 약 9킬로미터까지 올려보내고 고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3일 내에 북아메리카 상공까지 날려 보낼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일본은 풍선에 수소를 가득 채워서 하늘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제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정적인 고도를 유지시키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고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그 원리는 아주 간단했는데 모래주머니를 기구에 매달아 너무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고 

필요 이상으로 고도가 높아지면 수소가스를 일부 배출하고 

 9킬로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잘라버리는 형태로 고도를 유지시키도록 하였다. 

그런 식으로 고도를 유지하다 보면 미국 상공에 도착한 시점에는 수소가스를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매달고 온 폭탄을 아래로 떨어 뜨리기만 하면 되는 형태였다.  

풍선폭탄에는 15kg의 대인폭탄과 2개의 소이탄을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본은 풍선 폭탄을 이용하여 미국인으로 하여금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폭탄으로 인한 

공포심을 자극하고 건조한 숲에 거대한 산불을 일으켜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그에따라 일본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까지 9,000개 이상의 풍선폭탄을 미국으로 날려보냈다.

 실제 그 풍선폭탄들은 미국 본토는 물론이고 캐나다, 멕시코 등지에서도 관측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에 동부해안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에서 이 풍선폭탄을 관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풍선 폭탄은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일단 날려보낸 9,000개의 풍선폭탄 중에서 미국에서 실제 관측된 것은 300개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날려 올린 풍선 폭탄 1,000개 정도만이 미국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도착한 모든 풍선폭탄들이 임무를 완수하였다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실제 불발이 많았다. 

게다가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숲들은 그렇게까지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이탄 몇 발 따위로는

 거대한 산불을 일으키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미군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게 너무 높고 빠르게 날아다녔기 때문에 격추시키기가 어려웠고, 

만약 일본이 생물학병기나 화학병기를 사용한다면 1발만 명중해도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쓸데없이 일본의 사기를 올리고 싶지는 않았고, 일본이 미국 언론매체의 보도를 통해 자신들의 폭탄이 

대강 어디에 명중했는지 알게되면 더 정확한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미국 정부는 언론통제를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 언론에서는 관측된 풍선에 대해서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설령 주민들이 발견하더라도 군에서 관측용 기구를 사용한 것 정도로 둘러대면서 덮어버렸다.  

그런데 일본의 풍선 폭탄 딱 하나가 사람을 살상하긴 했다. 

타임라이프 지에 실린 바에 따르면, 어느 교회에서 목사 부부가 교회 신도들인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왔는데,

 나무에 걸린 풍선폭탄을 건드리다가 폭발해서 목사 부인과 아이들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무언가를 가지러 자신의 승용차로 돌아갔던 목사만 무사했다. 

물론 이 사건은 언론 통제로 전후에 공표되었다. 

1980년대말 일본 교계에서는 풍선폭탄 인명 살상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사과 편지를 넣은 풍선을 

미국에 날렸다고 한다. 

어쨌든 몇 기의 풍선폭탄이 온전한 상태로 포획이 되었고 미군은 그것을 세밀하게 조사 분석하였다.

 몇 개 남아있던 모래 주머니 속의 모래를 분석하였는데 그것이 일단 일본 해안에서 채취된 모래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과거 일본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공격했던 사례를 거론하면서 일본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미국 서부해안에서 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에 대한 정확한 진상을 알게 된 것은 종전 후였다.  

일본은 풍선폭탄을 정치 선전으로 사용하여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조용하자 풍선폭탄이 엉뚱한 곳에 날아갔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여 

1945년 4월 풍선폭탄을 이용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일본은 풍선폭탄 제작에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전쟁말기에 수소를 분리하는 비용이나 고공에 올라가도 쉽게 터지지 않는 풍선을 제조하는 비용이 

일본의 상황에서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본 군부에서는 "그러한 자금이 있으면 비행기나 더 생산하지 쓸데없이 뭐한거냐?"라며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