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파르티잔과 세르비아 체트니크의 네레트바 전투 - Yugoslavia Tito's Partisans VS Serbia Chetniks / Battle of Neretva

슈트름게슈쯔 2019. 5. 22. 12:25



네레트바 전투(1969) 속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사령관 티토 역의 율 브리너




세르비아 민족주의 유격대 체트니크(Chetnik)의 사령관역 두산 불라직(Dusan Bulajic)






파괴된 네레트바강 철교옆의 가교(假橋)를 건너 가는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파르티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등 

연합국을 자본주의자 정권이라고 비난했으나, 1941년 친독 성향의 유고슬라비아 왕정 체제가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로를 제공한 후 부터 대독 항전을 위한 방안 마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치 독일이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파르티잔 부대를 본격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 외에도 크로아티아의 극우 군사조직인 우스타샤와 전투를 벌였다.  

1941년 8월에는 세르비아를 거점으로 하던 우익 군사조직 체트니크의 수장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와 협력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미하일로비치의 반공산주의 성향으로 회담이 결렬되면서 체트니크와도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체트니크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추축국 군대와 항전을 벌이기보다는 파르티잔 토벌에 치중했다.

그래서 체트니크를 주로 지원하던 영국의 군사 조직은 이러한 양상에 실망감을 느끼고 점차 파르티잔 쪽으로 기울었다.  티토는 직접 파르티잔 부대를 이끌면서 비하치와 야이체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유고슬라비아 국민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약칭 AVNOJ)를 소집해 정치적인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더불어 유고슬라비아 각지의 인종과 종교 문제를 해결해 통합된 형태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선전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세 차례의 대규모 토벌 작전인 백색 작전(바이스 작전)과 흑색 작전(슈바르츠 작전), 

기사의 약진 작전(뢰셀슈푸룽 작전)을 벌이면서 독일군과 그 틈에 합세한 우스타샤, 체트니크 등의 

대공세로 수많은 병력을 잃고 티토 자신도 체포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기사의 약진 작전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뒤에는 연합군이 점령해 수비하던 안전지대인 비스 섬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그 곳에서 파르티잔 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영국 등 연합국과 전후 정부 재건 등에 관한 

민감한 사항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윈스턴 처칠과 회합한 자리에서는 영국군의 지원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정부 수립에 동의하기도 했으나,

 영국군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갔을 때에는 스탈린과도 협상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다.  

티토 지휘의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퇴각과 함께 광범위한 지역을 해방하면서 정규군으로 체제를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소련군과 연합해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독일군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서 영국군과 소련군이 행하려던 군사 작전을 거절하는 등의 독립적인 행동으로 

양국으로부터 점차 의심을 받게 되었고, 교묘하게 이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단일 집권을 꾀했다.  

독일군 퇴각 후에도 우스타샤나 체트니크 등 반공산주의 잔존 세력 토벌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해당 조직의 장교들이 파르티잔의 보복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병사들의 경우에는 개전의 정을 인정받아 풀어주거나 파르티잔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우스타샤의 지도자였던 안테 파벨리치는 스페인으로 망명했으며,

미하일로비치는 1946년에 참모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정보국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통해 전원 총살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