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수원 화성 장안문 전투시 파괴된 북한 공산군의 208번 T-34/85 전차 - Destroyed North Korean communist Army T-34/85 Tank NO 208 in the Suwon

슈트름게슈쯔 2020. 5. 19. 03:51



한국 6.25  전쟁중 수원 화성 장안문 전투시 국군이 매설해 놓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된 

북한 공산군의  208번 T-34/85 전차 





한국 6.25 전쟁중 반파된 형태의 수원 화성 장안문과 그 아래에서 파괴된 북한 공산군의 T-34/85 전차 - 1951


수원 화성 장안문이 파괴된 것은 북한 공산군 T-34/85의 공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아군이 장안문 내부에 설치해 놓았던 폭발물의 폭발 때문이었는지 

현재까지 그 원인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수원 화성 장안문 전투시 국군이 매설해 놓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된 

북한 공산군의 208번 T-34/85 전차 - 1951




한국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대에 서울이 점령된 후 수원 화성이 처음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은

 1950년 7월 4일에 있었던 수원 북방 전투때 였다. 

당시 국군은 한강 방어선에서 처절하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지만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1950년 7월 3일,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한강 방어선이 돌파당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수원으로 피신을 했고 계속 지연 작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강 방어선을 무너뜨린 북한 공산군은 다시 남하를 시작하여 수원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북한 공산군에게는 한강 방어선이 돌파되어 이제 국군은 수원 동쪽과 동북쪽, 

그리고 서북쪽 세 방향에서 집중 공격을 받게 된 셈이었다.

 당시 국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사실상 수원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을 더 벌기 위해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은 하루만이라도 수원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시키고자 했다.

그는  곧 수원 방면으로 향하는 곳에 저지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정일권 소장은 제 1사단에게 풍덕천 일대를 가능한 한 오래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했던 이유는  그 구역은 수원으로부터 겨우 5k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다른 구역보다 특히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일권 소장은 북한군의 남하를 방해하기 위해 수원을 관통하는 도로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T-34/85 전차에 집중 사격을 가해 북한 공산군이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한 전투 정신은 한 때 효과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군대의 거센 공격에 의해 곧 아군에게 탄약 보급과 물자 보급이 끊겨 

 아군의 형세가 수세에 몰리게 되자  바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북한 공산군은 그 기세를 타고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김홍일 소장 등은 남하하는 북한 공산군을 저지시키기 위해 통나무를 이용하여

 북한 공산군의 전차 궤도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 공산군의 전차부대가 끝내 국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모두 수원으로 돌격하자 

정일권 소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본부가 철수하는 동안 수원에 일부 병력을 호위로 남겨 북한 공산군의 공격을 저지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수원에 남은 후방 병력은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장안문 양쪽에는 튼튼한 성벽이 길게 세워져 있어서 

북한 공산군의 소련제 T-34/85 전차대의 남하를 충분히 저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수원 화성이 1796년에 축조된 성이라는 점이었다. 

정조 때의 수원 화성은 그 이전까지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던 옹성과 공심돈 등을 내세워 

어떤 무기에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요새였다. 

하지만 북한 공산군에게는 85mm포를 장착한 강력한 무기인 소련제 T-34/85 전차가 있었다. 

그나마 장안문의 옹성과 성벽은 전차의 포탄을 충분히 막아 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옹성의 철문과 장안문의 철문은 포탄을 단 몇 발만 맞아도 쉽게 부서져버릴수 있었다.

국군이 장안문을 중심으로 저지선을 구축해 봤자 북 공산군의 전차부대는 

장안문의 철문만 집중공격하면 방어선이 바로 뚫릴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국군이 가진 무기로는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장안문의 철문을 부수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한 현실 때문에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서울 한강 인도교 폭파 명령 받은 장교)은 

북한 공산군의 T-34/85 전차부대가 수원으로 진입하는 걸 막기 위해 당장 장안문을 폭파시켜 

도로를 끊어버리고 장안문의 잔해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농성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당시 정일권 소장이 하달한 "작전명령 제 18호"로 최창식 대령은 그에 따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것 뿐이었다.

정일권 소장의 명령을 받아 내린 최창식 대령의 명령에 따라 박후준 중위 등이 

장안문을 폭파하기 위해 장안문에 폭발물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안양에서 철수하여 장안문 근처를 지나치고 있었던 의로운 군인이었던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이종찬 대령은 국군 병사들에게 당장 폭발물 설치 작업을 중단하라고 했다.

그는 말하길 현 시점에서 북문을 파괴한다고 하여 전술적으로 아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민족의 귀중한 사적만을 인멸케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후일 민족의 지탄을 어찌 받을것이냐 ?고 했다.

이종찬 대령은 최창식 대령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면서 장안문의 폭파 작업을 취소해 달라고 설득했다.

이종찬 대령의 그러한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최창식 대령은 고민 끝에 장안문의 폭파 작업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당시 미군이 일본에서 긴급 공수하여 국군에게 지원해 준 M15 대전차지뢰 20여발을

 장안문 주위에 매설하도록 했고 모든 병력들로 하여금 장안문의 성벽과 문루로 올라가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7월 4일 늦은 오후에 북한 공산군의 전차부대가 장안문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북한 공산군은 T-34/85 전차를 앞세워 포탄을 쏘면서 접근해 왔다.

국군은 장안문의 성벽에 의존해 버티기 작전으로 나왔다. 

당시 소련의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라주바예프(Vladimir Nikolaevich Razuvaev)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한민국 육군은 대전차포까지 동원해 북한 공산군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국군은 북한 공산군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장안문의 문루와 성벽에서 내려와 철수하고 말았는데 

그 시간은 오후 5시경이었다. 

그런데 그 때 공격을 서두르던 북한 공산군의 T-34/85 전차 두 대가 

국군이 장안문 주위에 매설해 둔 M15 대전차지뢰를 밟아 폭발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국군이 대전차지뢰로 북한군의 전차를 파괴시키는 전과의 순간이었다. 

소련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대전차 지뢰 때문에 파괴된 북한 공산군의 T-34/85 전차 2대 말고도 

1대가 한국 육군의 대전차포에 의해 추가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국군은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하루 간의 지연전 끝에 북한 공산군에게 수원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국군의 목적은 미군이 참전할 때까지 북한 공산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한 공산군의 소련제 T-34/85 적 전차 3대 파괴는 아군의 충분한 성과로 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