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1980년대 초 서울 시내버스 차장의 애환과 삥땅

슈트름게슈쯔 2020. 9. 1. 15:30

도시로 간 처녀(1981) 속 1980년대 초 서울 시내버스 차장의 애환과 삥땅

 


한국의 각 도시 시내버스에 여차장이 있던 시절 승객들의 요금을 빼돌리는 행위를 
뜻하던 은어는 ‘삥땅’이었다.  이 말은 화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삥’은 1, ‘땅’은 두 장이 똑같다는 뜻이니  곧 1땅(땡)으로 작은 이득을 뜻한다. 
버스 차장의 ‘장’은 한자로 ‘長’이 아니라 ‘掌’인데 ‘맡다’는 의미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1961년부터 버스 차장은  남성에서 대부분 여성으로 교체됐다. 
그리고 시내버스의 여성 차장이 여성스럽고 존중하는 느낌을 주는 안내양으로

바뀐 것은 고속도로가 건설된 뒤 고속버스 차장을 한단계 품위 있게 안내양이라는

직업명울 붙이게 된 시점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1960, 70년대 당시 가난에 찌들려 무슨 일이든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여성들이 선택한 직업중 하나는 버스 안내양이었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생활은 어떤 직업보다도 고달팠다. 

버스 안내양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종점과 종점을 일곱 여덟번은 돌아야 했다.
버스 안내양의 적은 임금 탓이 컸겠지만 ‘견물생심’이라고 현금을 만지는 안내양들의

‘삥땅’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삥땅’을 막으려고 차주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종점에 도착하면 돈을 숨겼는지 확인하려고 
감독들은 높이 1m의 줄을 쳐 놓고 뛰어넘을 것을 강요했다.  또 안내양들의 몸을 샅샅이 수색했다. 
알몸 조사 같은 비인간적인 인권 침해도 더러 있었다.
한 달에도 대여섯 번씩 몸을 수색당하는 수모를 견디다 못한  안내양이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도 생겼다. 
속칭 ‘암행’이라고 불렸던 감시원이 버스에 탑승하기도 했다. 
일부 안내양들이 삥땅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월급보다 많은 요금을 빼돌리고 그 돈으로 
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삥땅은 어쩌면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운전사와 안내양이 서로 짜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감독들에게 상납도 했다.  1970년 4월 28일 서울 YMCA 대강당에서는 
‘버스 여차장의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안내양의 한 달 월급은 1만원가량 됐으나 
식비를 떼고 나면 당시 월급으로도 매우 적은 4000원 정도 받았다. 삥땅으로 한 달에 2만원을 빼돌리는 일도 있었으니 
사업주로서도 손실이 컸다. 시내버스 요금 삥땅 문제가 커지자 서울에서는 1977년 12월 1일 
버스 토큰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러했던 이유는 토큰이 암거래되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토큰 60만개를 1년 동안 빼내 판 안내양 20명이 적발되기도 했다. 

승하차 문을 따로 만들어  요금을 선불로 받는 자율버스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2년 무렵이다. 안내양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안내양은 그 뒤에도 일부 명맥을 유지해 왔지만 
마지막으로 없어진 것은 김포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운행하던 김포교통 소속 안내양 38명이 사표를 낸  
1989년 4월이었다.

 

 

 

1980년대 초 서울 시내버스 차장의 애환과 삥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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