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핀란드 라테 로드에서 괴멸된 소련군 44 사단 -Soviet Red Army 44th Rifle Division's destruction by the Finnish defence Force in the Raate road

슈트름게슈쯔 2021. 1. 6. 01:03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의 수오무쌀미-라테간의 라테 로드에서 핀란드 방위군의 모티 전술에 의해

괴멸된 소련군 163사단과 44사단 - 1940년 1월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인류사의 최대 비극인 제 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선제 공격에 나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도 전쟁 개시 17일 만에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넘었다.
소련은 유럽을 손아귀에 쥐려는 독일의 야심을 눈치채고,위험한 독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면서
그동안 감춰둔 영토 확장의 욕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독일과 소련의 기습적인 협공에 폴란드가 맥없이 나가떨어진 뒤
소련이 다음으로 선택한 먹잇감은 북유럽의 산림국가 핀란드였다.
그러나 소련은 105일간의 첫 핀란드 침공에서 전쟁사에 수치로 남을 만한 졸전을 펼쳤다.
자신의 덩치만 믿고 약소국에 덤볐다가 톡톡히 혼이 난 셈이었다.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2일까지 한 겨울동안 소련과 핀란드가 치른

치열했던 전쟁을 계절의 이름을 그대로 전쟝의 이름으로 붙여 ‘겨울전쟁’이라고 일컫는다.

소련은 유럽에 전쟁의 화염이 타오르자 평소 눈엣가시 같은 핀란드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영토 일부의 사용권’을 요구했다.
핀란드는 이를 거부하고 마르티 형제 등과 같은 민병대를 소집한다.
핀란드 청년들은 변변한 보급품도 없이 소총 한 자루,작은 모표만 받아들고 전선으로 향한다.
그들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강인한 농민이고 노련한 사냥꾼들이다.
 핀란드군은 최전선에 참호를 파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지만,
소련군은 폭격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포격을 퍼부으며,물밀듯이 들이닥친다.

 

라테 로드 전투는 겨울전쟁이 발발했던 1939년 11월 30일로부터 한달 이후 1940년 1월 초에 발생했으며

라테-수오무쌀미 간의 도로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오무쌀미 전투의 일부였다.  

1939년 12월 소련 제163사단은 수오무쌀미를 함락시켰으나 핀란드 영토 깊숙히애서 고립되었고,

소련 제 44소총사단이 제 163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 뒤 1주일에 거쳐

햘마르 실라스부오 대령의 핀란드 제 9사단이 라테-수오무살미 간 도로에서 소련군을 결정적으로 분쇄하였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 방위군의 모티 전술이 그 위력을 입증했다.

 

소련은 겨울전쟁전 핀란드 침략전의 승리를 낙관하고 있었지만 추계공세의 준비는 불충분했다.
특히 삼림에서의 싸움을 상정하지도 않았고 둔중하고 공격당하기 쉬운 차량을 많이 사용했다.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겨울의 기상조건은 영하 40도에 이르는 날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것도 핀란드군에 유리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소련군의 전사자 80%는 동사에 의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또, 스탈린의 대숙청에 의해 장교들이 대부분 죽게 되었으며,
제 1차 세계대전때의 복고적 전술이었던 총검 돌격 형태의 전술을 반복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숲 속의 길을 행진하는 것 밖에 없었던 소련군 부대는 흰 옷으로 위장한 핀란드 저격병들에게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잠복공격은 이후 포위전술로 발전되었다. 스키 부대 등을 활용해서
행진하는 소련군 부대의 선두와 후미를 때려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술이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 163사단과 소련군 최강의 병력으로 알려진 44 저격사단은
핀란드군에게 오합지졸과 같은 형태로 완전히 괴멸되어 버렸다.
 핀란드군은 무기, 탄약, 장비가 극도로 부족했지만,
개전시 초기훈련을 종료한 병사들만 군복과 무기가 지급되었고,
남은 자들은 스스로 무기를 조달하고 군복을 제작해야 했다.
이런 자작 군복에 대해서 당시 핀란드 정부의 수상의 이름을 따서 카얀델 모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소련에게 탈취한 장비, 무기, 탄약이 적극적으로 재이용되었다.
핀란드 독립 후 소총 구경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소련의 탄약을 그대로 사용할수 있던 것이 행운이었다.

12월 9일부터 개시된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핀란드 9사단은
1월 초에 걸쳐 소련의 9군 제 163저격병사단 및 제 44 소총사단을 완전히 격파시켰다.
이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전사로 기록되어 있듯이 한마디로 자국을 유린하기 위해서
침략해 들어온 침략자 소련군으로 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악한 조건에서도 구국의 일념하에 핀란드 전국민이 합심으로 막아내었던 숭고한 전투였다.

소련군은 겨울전쟁 3개월여만에 전사자 4만 8800명을 포함해 거의 20만명에 이르는 병력 피해를 입었다.
반면 핀란드군은 전사자 2만 5000명을 포함해 6만 85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소련군이 3배 이상의 인명손실을 입은 셈이었다.
소련군은 1940년 1월 전선 전역에서 공격에 애를 먹자 헬싱키,비푸리 등에
한달동안 7000여회의 공중 폭격을 감행하여 핀란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