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군 150mm sFH18 중곡사포대의 라트비아 농가 소련군 탄약고 포격 - German 150mm heavy field howitzer bomberdment a Soviet red army ammunition warehouse in the Latvian farmhouse

슈트름게슈쯔 2021. 1. 11. 19:38

발트해 3국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시내에서 진군하는 독일군들과 그들을 해방군으로 여기고

영하며 꽃을 전달하고 있는 라트비아 리가 시민들 - 1941년 6월 14일 

 

 

독일군 150mm sFH18 중곡사포대의 라트비아 농가 소련군 화약고 포격 - 1941년 6월  

 

 

1939년 8월 공산제국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과 나치 독일의 리벤드롭 외무부장관은 폴란드를 기준으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에 대한 세력권을 나눠 가지며 서로 침략을 하지 말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러한 조약은 전체주의 나찌즘과 공산주의 코뮤니즘의 두 침략국가들의 일시적인 조약에 지나지 않았다.

1940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었다.

동시에 교활한 소련 또한 폴란드 동부였던 발트해 3국을 그들의 영향권 아래 넣고

1940년 6월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발트해 3국을 침공했다.

소련의 침공은 서유럽 문화권에 속해 있던 발트해 3국에 악몽을 안겨 주었다.

당시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형됐고 농장과 사유재산은 모두 국가로 넘어갔으며

교회의 집회 또한 금지됐다. 1941년 6월 13일과 14일 밤, 당시 라트비아인 1만5천여 명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됐다.

그들의 죄명은 정치범이라는 이유였지만 실제 정치범의 비율은 낮았으며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끌려간 사람들중 나중에 단 1%만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 상당수는 강제 이주 열차와 집단노동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나치 독일과 공산제국 소련 양국은

1년도 안 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적이 되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해 소련의 붉은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의 공포정치에 떨고 있던 라트비아인들에게 독일군은 해방군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독일이 라트비아를 위해 함께 싸우며 라트비아를 독립국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고

히틀러의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공산주의 소련에 맞서기 위해 독일군에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군은 많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끌고 갔고 군수물자 확보에 열중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히틀러는 '전 국토를 전장화하고 국가 전체를 병영화하는' 총력전을 선언하고

1943년 1월 독일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는 자원친위대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라트비아 정부는 독일로부터 '종전 후 독립국가 창설을 돕는다'는 약속을 받고 자원친위대 결성에 동의하여

3월 16일 라트비아 자원 친위대 2개 대대를 창설했다. 하지만, 실제 자원한 사람은 15%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강제동원이었다. 그렇게 해서 약 11만5천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전쟁 끝 무렵인

1945년 전선에 투입돼 그중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라트비아의 독립과 공산주의로부터

유럽을 수호하려는 라트비아인들의 뜻과는 달리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열중했고

라트비아 자원친위대 역시 그 죄를 함께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