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악랄했던 나치 독일 법원장 프라이슬러를 응징한 미 제 8공군 B-17 폭격기- US Eighth Air Force 100th BG B-17 Bomber bombing that sent the vicious Nazi German Judge President of the People's Court Roland Freisler

슈트름게슈쯔 2021. 2. 6. 17:00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베를린 폭격으로 악랄했던 나치 독일의 인민 법정 법원장이었던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응징한 미 제 8공군 로버트 로젠탈 중령의 100폭격대대 B-17 폭격기 - 1945년 2월 3일 

 

 

미 제 8공군 로버트 로젠탈 중령의 100폭격대대의 B-17 폭격기가

베를린 상공에서 투하시키는 500파운드 폭탄 더미 - 1945년 2월 3일 

 

독일의 항복 3개월전 베를린 시내의 건물들은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군 폭격대대의

363차례 폭격으로 인해 이미 지붕이 있는 건물은 보이지가 않는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독일 베를린 인민 법정 건물 - 1945 

 

 

나치 독일의 인민 법정 법원장이었던 롤란트 프라이슬러(1893~1945)

 

 

2021년 2월 4일 대한민국 국민의힘 권영세 국회의원은 "사법부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져야 할 대법원장이

헌법적 책무를 내팽개친 채 소속 법관을 '보복 정치의 제물'로 내던졌다"며 임성근 부장판사 사직을 거부한

OOO대법원장을 비판했다. 권 의원은 2021년 2월 3일 페이스북에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다는 이유로

사상 최초로 구속기소된 전임 대법원장을 이은 OOO대법원장이라며

"더 심각한 정치적 고려를 한 것이 드러난 만큼 그의 앞날도 밝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www.facebook.com/yskwon21/posts/4947298215340694

권 의원은 또 OOO대법원장을 나치 법률가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빗댔다. '피의 판사'로 불리는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나치 독일의 법무차관과 인민법정 법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권 의원은 "프라이슬러가 법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사형선고율이 급증했다"며 "심리 중에도 정치적 피고인들에게 모욕적 언사를 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정치적 설교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부연했다.  또 그는 "나치에 아부하고 맹종한 그였지만

괴벨스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지는 못했다"며 "과거 공산주의 행적을 이유로

히틀러가 거부했다고 알려진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권 의원은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며

"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재판을 심리하던 중 연합군 공습에 피격돼 사망했는데,

그의 무덤에는 이름조차 새겨져 있지 않다"고 했다.

 

 

나치 독일 정권 시절 히틀러를 반대하는 세력이었던 독일 정치범들에 대한 무더기 사형 판결로 인해

악랄한 나치 법원장으로 유명했던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나치 독일의 법학자이자 법관, 정치인으로

1934년부터 1942년까지 제 3 제국 독일의 법무차관을 지냈으며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인민법정 법원장을 지냈다.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별명은 피의 판사(Blutrichter)였다.  

프라이슬러는 열성적인 나치즘 사상가로 판사로서 독일 법체계의 나치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홀로코스트를 논의한 반제 회담에도 참석했다. 그는 1942년에 인민법정의 법원장으로 임명되어

주요 정치범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의 공격적인 인성과 피고를 모욕하는 태도와 

잦은 사형 선고로 악명을 떨쳤다.  독일 연방공화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사형은 폐지됐으나,

프라이슬러가 1941년에 내린 살인의 정의는 오늘날에도 독일 형법 각칙 제16장 제211절로 남아있다.

1933년 2월에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프라이슬러는 프로이센 법무부 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1933년부터 1934년까지 프로이센 법무부 차관을, 1934년부터 1942년까지 제국 법무차관을 지냈다.  

프라이슬러는 열성 나치즘 사상가였으며 그는 그의 법률 기술을 사법 제도와 입법 과정에

나치즘을 적용시키는 데 썼다. 프라이슬러는 자신의 논문 [미성년 형법 개혁에서의 인종,

생물학적 과업(Die rassebiologische Aufgabe bei der Neugestaltung des Jugendstrafrechts)]에서

외국인 청소년과 인종적으로 열등한 청소년, 인종적으로 구제 불능이거나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청소년들은 소년원이나 감화교육원으로 보내야 하고 독일인및 인종적으로 우수한 이들과는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라이슬러는 인종 오염을 처벌하는 법의 제정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독일 안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법안을 만드는 데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

그는 미국의 짐크로 법이 흑인을 법적으로 정의하지 못한 초기 단계의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 판사들은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의 혼혈 출산을 금지하는 주의 법률로

누가 흑인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와 비슷하게 독일 법도 유대인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용어를 법률상 정밀하게 정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일부 보수적인 나치 법률가들은 누구를 유대인으로 정의할 것인지를 정밀하게 정의하지 않은 데에 반대했다.

1939년 10월에 프라이슬러는 미성년 흉악범 처벌법에서 '조숙한 미성년 범죄'의 개념을 도입했다.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독일 법원에서는 적어도 72명의 미성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이 가운데에는 1942년에 전쟁을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한 죄로 대역죄를 선고받은

17살의 헬무트 휘베너도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 소련에서 대숙청이 벌어질 때 프라이슬러는

모스크바 재판을 참관하러 갔는데, 그는 이후에 소련과 협력했다는 어떠한 암시도 부정했다.

그러나 그가 독일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소련과 협력한 정치 위원'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1942년 1월 20일에 프라이슬러는 법무부 장관 프란츠 슐레겔베르거를 대신해 반제 회담에 참석했다.

1942년 8월 20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인민법원 법원장이었던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프라이슬러를 후임 인민법정 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인민법정은 암시장 행위와 태업, 패배주의 등 광범위한 정치적 공격행위를 다루었는데,

프라이슬러는 이러한 행위들을 방위력 붕괴 행위로 보고 엄한 판결을 내렸으며 사형도 많이 선고했다.

프라이슬러가 법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사형 선고 횟수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피고의 약 90%가 프라이슬러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5,000여 건이 넘는 사형 판결을 내렸다.

이 시기에 프라이슬러는 피고들을 질책하며 악명을 떨쳤다.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적절한 방법으로 피고들을 질책했고 특히 나치 독일의 권위에 저항하는

피고들에게는 때로는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는 거친 언행으로 악명 높고 소련의 대숙청 시기에 검찰총장을 지낸 안드레이 비신스키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프라이슬러는 1938년에 모스크바에서 비신스키의 행동을 본 바 있다.

1944년 8월에 7·20 음모의 연류자들이 인민법정에 출석했고,

프라이슬러가 어떻게 재판을 이끌었는지 영상으로 녹화됐다.

그는 피고들에게 기소된 죄목을 입증하기 위해 지적인 질문을 던지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격분한 상태에서 고함을 치며 언어, 심리적으로 희롱했다.

 

야전원수 에르빈 폰 비츨레벤이 크고 낡은 옷을 입어 바지를 위로 올리려 하자

"이 더러운 늙은이, 왜 계속 바지를 만지작거리나?"라고 꾸짖었다.

울리히 빌헬름 그라프 슈베린 폰 슈바넨펠트에게는 과장된 연극조로

"당신은 몹시 형편없는 쓰레기 덩어리군!(Sie sind ja ein schäbiger Lump!)"이라고 소리쳤다.

피고 대부분이 교수형 판결을 받았고 일부는 재판이 있은지 2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나치 독일의 항복 3개월 전 1945년 2월 3일 아침 프라이슬러는 인민법정의 토요일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시각 베를린 상공에서는 미국 육군 항공대 제 8공군 로버트 로젠탈 중령의 100폭격대대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들이 베를린을 폭격했고

그 폭격으로 인민법정과 국가수상부, 게슈타포 본부 등의 건물이 공습의 피해를 받았다.

공습 경보를 들은 프라이슬러는 서둘러 휴정을 선언하고 죄수들을 방공호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프라이슬러는 떠나기 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오전 11시 8분에 폭탄이 인민법정에 떨어졌고

부분적인 내부 붕괴를 일으켰다. 프라이슬러는 무너진 석조 기둥에 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서류를 쥔 채 돌무더기 사이에 있었다.

그가 정리하던 서류 가운데에는 7·20 음모에 연류돼 그날 처형을 앞두고 있던 파비안 폰 슐라브렌도르프도 있었는데,

그는 뒷날 연방헌법법원 재판관을 지냈다.  한 외신 기자는 분명히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고, 알프레트 요들의 아내였던 루이제 폰 벤다는 뤼초프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프라이슬러의 시신이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이것은 신의 판결이다'라고 말했고,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고 25년 뒤에 말했다.

그의 시신은 베를린의 공동묘지에 그의 아내의 가족들과 함께 묻혔고, 비석에는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