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1980년대 에로배우 스타

슈트름게슈쯔 2011. 6. 14. 12:50

 

대한민국에서의 1980년대는 에로영화(eroticism movies)의 전성시대 였다.

그것은 1980년대 군사 독재 정권 치하에서의 국민 민심 다지기용으로서의 그 역할이 십분 활용되었다.

그러했던 사회적 분위기상의 관계로 당시 서슬이 시퍼랬던 군사 독재 정권의 유지 차원에서는

 문화 매체의 검열이 대단히 엄중했기에

다른 장르의 영화보다도 소위 찍었다 하면 돈이 된다는 입장으로 에로 영화가 대단히 성행하였다.

 그것은 어쩔수 없이 문화의 정체시대였던 군사 정권시대의 어두웠던 사회적 단면이기도 했다. 

즉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세력의 국민들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성(性)과 식(食)을 이용하여

그 민생고를 극장에 가서 그런 영화를 보며 해소시키려고 했었던 것이었다.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음성적이고도 이상한 형태의 성문화를 증폭시켜 당시 동네 곳곳의 벽보에는 

극장의 영화 홍보용 에로 영화의 포스터가 범람했다.

이러했던 관계로 한창 공부할 나이의 청소년들 또한 시국을 비판하며 데모를 하면서도 

어쩔수 없는 에로 영화의 범람 문화에 적응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한창 피끓는 나이의 청춘기에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지말고 에로 영화를

보면서 그 청춘의 열기를 삭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에 '변강쇠', '뽕', '산딸기', '무릎과 무릎사이',

'애마부인',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어우동' 등의 에로영화가 쏟아져나왔다.

이들 영화들은 한번 흥행에 성공하면 대부분 시리즈로 제작돼 기나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특징도 보였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애마부인' 시리즈로 1대 안소영, 2대 오수비, 3대 김부선 등

새로운 애마부인을 탄생시키며 11편까지 제작돼 눈길을 모았다.

당시 정상급 여배우들도 너나할 것 없이 에로영화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에로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인 여배우들도 많았다.

 



원조 애마부인인 그래머 배우 안소영.

 1982년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으로 영화에 데뷔하며 국내에 에로영화의 붐을 몰고왔다.

안소영은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애마부인 1호 안소영


비에 젖은 속옷이 몸에 착착 감긴다. 훤히 드러나는 물 머금은 여체의 굴곡. 말이 뛸 때마다 출렁거리는 그녀.

클로즈업되면서 다가올수록 숨 넘어가는 관객들.

조금만 더 가까이.... 하지만 그녀의 큰 가슴은 보일 듯 말 듯한 실루엣.

한국 에로영화의 문을 연 〈애마부인〉(1982년)의 1대 애마 안소영.

배우 5년차로 조연급이었던 그녀는 그 영화 한 편으로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막 벗어젖히는 지금을 생각하면 그때의 노출신은 그야말로 애들 장난.

안소영, 그녀는 매우 육감적이었다.

키 161㎝에 허리 21, 몸무게 44㎏의 낭창낭창한 몸매. 하얀 얼굴, 큰 눈,

갸름한 얼굴에 가냘픈 목선. 청순가련형에 가깝지만 목선을 타고 내려가다 만나는 가슴에 이르면 갑자기 숨이 가빠진다.

 95㎝(38). 그때까지 터질 듯한 그 큰 가슴을 용케도 숨기고 있었다.

한국적 섹시미의 전형이 아닐까.  애마부인은 30만 명을 동원한 대히트작.

11편까지 이어지며 오수비-김부선-하유미 등 한국 여배우의 왕가슴 역사를 썼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애마부인의 한자어는 말(馬)을 사랑한 愛馬夫人이 아니라 愛麻夫人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가 야하다는 이유로 '愛馬'를 못쓰게 하자 엉뚱한 '麻'를 붙인 것이었다.

馬를 못쓰게 한 측이나 그렇다고 麻를 갖다붙인 측이나 그게 그것.

1982년 10월 주간경향 스튜디오에서 만난 스물네 살 안소영.







 김치공장 사장이 된 애마부인 안소영

 


“영화배우라구요? 그래요. 저도 배우였지요. 그 시절을 못 잊고 살지만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네요.

바쁘게 살다보니 고민하고 외로워할 틈도 없었어요.

 결혼은 안했지만 이쁜 우리 아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요.”


안소영. 그녀는 80년대 은막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영화 ‘애마부인’시리즈의 원조 글래머 스타였다.

지금 그녀는 김치를 생산하는 식품회사의 사장으로 변신해 있다.

오랫동안 모습을 감춘 그녀를 최근 ‘애마부인’을 연출했던 정인엽 감독의 아들 결혼식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압구정동 찻집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기자에게 독특하고 씩씩하게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떻게 감쪽같이 종적을 감추고 살았어요?


미국서 8년을 살고 2년 전에 돌아왔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활동을 하지 않기로 작정하면서 영화 쪽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연락도 안해 종적을 감춘 것처럼 생각들 하나 봐요. 죄진 일도 없는데 숨어 살 건 없잖아요.


미국서 8년이라면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나요?


뉴욕과 가까운 뉴저지에서 식당을 운영했어요.

한식당인데 원래 제가 요리를 잘하는 편이라 쉽게 생각하고 덤볐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식당업이라는 게 몸으로 떼우는 중노동이더라구요. 잠이 늘 부족했어요.

우리 동포들 모두 그렇게 열심히들 살아요.

 피눈물 나게 일하고 저축해서 자식 교육 제대로 시키며...

그렇게 힘들게 살면 자신이 힘들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니까요.


기반을 잡았을 텐데 왜 귀국했어요?


올해 74살 되신 어머니도 계시고 또 우리 아들이 어릴 때 어느 정도 내 나라에서의 정서교육도 필요할 것 같고. 미국의 교육환경이 선진국답게 자유스럽고 이상적이지만 어릴 때부터 미국물이 들면 의식구조도 미국사람으로 바뀔 것 같아 그래도 좀 자랄 때까지 여기서 키우고 싶어요.


결혼은 언제 했지요?


결혼요? 제가 지금50 살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결혼 한 적이 없어요.

내 팔자에 결혼 운은 없나 봐요.

일찍부터 결혼하려는 꿈도 접었고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이제는 안 들어요.

사실 저는 겉보기가 여자이지 처신하는 것이나 속 마음씨는 남자와 같아요.

 영화에서는 사랑의 화신처럼 보였지만 사실 전 연애에 소질이 없어요.

좀 바보스럽다고 할까요.

이성교제는 취미 없는 종목 같아요.


어쩌다 낳게 되었어요.

임신을 하고 물론 낳고 싶어서 낳았지요.

올해 11살로 초등학교 4학년인데 귀엽게 잘 커요. 이곳에서 낳아 한 살 때 미국으로 갔었지요.


그럼 그 아이 아버지는?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 않아요. 제게 아이가 있다는 걸 그분의 집안에서도 알고 있어요. 낳아 준 아버지 쪽의 호적에 올렸어요. 태어나서부터 엄마만 보고 살지만 우린 행복해요. 저의 사랑도 행복이나 꿈도 모두 아들과 함께 있어요.


이런 솔직함이 기자가 기억하는 안소영이었다. 지금 보면 꽉 막혔던 80년 대의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원했건 그러지 않았건 간에 20대 초반에 나이에 ‘가슴만 있는 여자’처럼 알려지며 남성들의 섹스 심볼로 살아야 했던 그녀. 매스컴은 그녀를 자극적인 상품으로 포장했고, 보수주의자들은 그녀를 성(性)의 마녀처럼 손가락질했다. 모르긴 해도 혼자서 많이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그 상처를 이겨낸 힘은 바로 그녀의 이런 당당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그녀는 영화를 떠났던 걸까?


영화를 떠난 지가 언제였죠?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마지막 작품이었어요.

그 후 압구정동에서 의상실을 열어 사업이란 것에 눈을 떴어요.


지금은?


하남시에서 김치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직원은 수십명 정도지만 제대로 된 현대시설의 식품회사인데 지금은 학교 급식용 김치를 납품하고 있어요.

앞으로 수출까지 생각하겠다는 그림도 그려 보고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구상을 했어요.

 우리 식품 중에 국제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식품이 김치라는 것을 느꼈고 저도 김치 담그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아요.

 지금은 제 삶이 소중하지만 그래도 한 시절 꿈을 폈던 배우 때를 잊을 수는 없겠지요.

원래 연극부터 했으니까 기회가 오면 다시 연극을 하고 싶어요.

 출연보다 뮤지컬 작품을 하나 제작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요.

그런데 바깥에서 요즘 연예계 돌아가는 걸 보면 우리들 때와는 사고방식이나 스케일 등 모두가 딴 세상 같이 보여요.

그때는 영화라면 영화인들끼리 인간적인 관계가 돈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는데

요즘은 냉정하고 비즈니스적인 게 우선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출연료를 안 따졌잖아요.


무엇을 하든 행복해지려는 것이 사람들의 소망인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행복지수를 이야기한다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행복한 순간보다 생각하기 싫은 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아마도 7대 3정도로.. 어둡고 답답한 길들이 너무 많았고 힘들었어요.

성격이 타협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 외로울 때도 많았구요.

이제 아들과 함께 평온하고 실속 있게 잘 살고 있어요.

행복이 7이라면 불행지수는 3정도랄까.

사실 행복이다 불행이다 라는 것이 우리 마음의 수양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애마부인 이후 안소영은 충무로의 우뚝한 히로인이 되었다.

그리고 충무로를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에게선 그 당당함이 가득했다.

인기라는 파인더를 통해 자기의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며 초조하게 살아가야 하는

연예계를 떠나 이제 행복도 불행도 자기가 관리하기 나름이라고 말하는 식품회사의 안소영 사장. 80년대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여전히 당당하게 오늘을 살고 있었다.

(2007.12.8 인터뷰365)





1988년 영화 '합궁'에서 이대근과 열연하고 있는 안소영






 안소영 "'애마부인'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

 


'애마부인' 이미지 탈피하고 싶어 잠적했었다"


 


영화 '애마부인'으로 80년대 섹시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던 중년 배우 안소영이 당시 '노 개런티'로 출연했던 사실을 밝혔다.

10일 오후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섹시클럽 발리에서 열린 자신의 첫번째 누드 화보집 쇼케이스 행사에서

안소영은 "누드를 찍은 것은 도전하고 싶어서일 뿐 돈이 목적은 아니다"며

 "'애마부인'을 찍을 때도 도전하고 싶어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고 밝혔다.

 안소영은 "우리나라는 여자가 나이 40이 넘으면 아줌마로 취급한다.

중년여성도 당당하게 살 필요가 있고, 누드라는 선입견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며

"'애마부인' 때도 내가 총대를 멨듯이, 지금도 내가 총대를 메는 것"이라고 누드 화보 촬영 계기를 밝혔다.

안소영은 1982년 '애마부인'으로 데뷔해 '산딸기', '그 섬에 가고 싶다' 등에 출연하며

당대의 대표적인 섹시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배우.

 활동을 접고 해외에서 생활하던 안소영은 누드 화보 촬영으로 활동 재개를 알렸다.


안소영은 "전부 다 '애마부인 안소영', '원조 애마'라고들 하는데 그 '애마부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어

그동안 잠적하고 방송을 안했던 것"이라며 "금년 봄 미국에서 한 슈퍼마켓에 갔을 때 사람들이 전면에

'애마부인 안소영'으로 도배된 신문을 보여줬는데,

그때 '내가 도망다니고 벗어나려 해도 결국 애마부인일 수밖에 없구나' 생각했다"고 활동 재개를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안소영은 "영화 배우니까 영화를 다시 할 것이고, 우선 연극으로 재기를 하고 싶다"며

"예전처럼 섹시한 배우로 알려지고 싶은 생각은 없고 이제 연기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누드집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안소영은 하반기 극단 제작극회가 준비중인 뮤지컬을 통해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며, 영화 및 음반 활동도 계획 중이다.

이날 안소영은 자신의 누드 화보집 쇼케이스를 통해, 중년의 나이에도 훌륭하게 유지하고 있는 몸매를 공개했다.

이 화보는 안소영의 친동생인 사진작가 안기천씨가 촬영했으며,

11일 SKT 등 모바일을 통해 공개된다.


(2005.8.10 머니투데이)


 

 

 



 

 


1996년 오수비


'애마부인 2'에서 2대 애마로 출연한 오수비의 농염한 자태. 80년대 군부정권 아래 분출구를 성에서 밖에 찾을 수 없었던 시절 풍만한 가슴을 앞세운 애마부인 시리즈는 흥행가도를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안소영과 오수비를 잇는 3대 애마로서 80년대를 대표한 섹스 심벌 김부선.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권상우를 유혹하는 분식집 아줌마로 등장해 농익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1988년 '변강쇠 3'에서 옹녀로 출연한 하유미. '변강쇠'시리즈도 '애마부인' 시리즈 못지 않게 80년대 인기를 끈 작품 가운데 하나로 1985년 개봉한 제1편에서는 원미경이 이대근과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1980년대 영화 '산딸기2', '웅담부인' 등 성인영화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누린 선우일란. 여름철 달력에 자주 등장한 인물 중 한명이다. 녹색 수영복을 입고 시원한 계곡을 배경으로 볼륨있는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로 유명한 최정상의 에로스타 진도희씨와 개인사업가 신영호씨가 2000년 11월4일 결혼식을 올렸다..



 

 


1995년 16㎜ 에로비디오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주인공 진도희. 풍만한 가슴의 그가 이 영화를 빅히트시킨 이후 '꽈배기부인 몸풀렸네' '자라부인 뒤집혔네' 등 수없는 아류작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