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화로를 들이대고 담뱃불을 붙인 항일 민족 시인 이상화

슈트름게슈쯔 2012. 7. 18. 12:17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성당에서 이상화, 서상돈 고택으로 가는길 오른쪽에 새겨놓은 모자이크화 - 2012년 1월

 

 

 

민족 시인 이상화와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모자이크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 시인이었던 이상화 선생의 고택

 

 

 

 

 

 

이상화 시비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근대골목으로의 여행 안내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서상돈선생의 고택

 

 

 

서상돈 선생의 고택은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마주보고 있다.

 

 

 

서상돈 선생 고택내

 

 

 

골목 끝자락에는 계산성당 주변의 모습과 이상화의 벽화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이상화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자 문학가, 평론가,번역 문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호는 상화(尙火, 想華),이며 무량(無量)또는 백아(白啞)이다.

 

시인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이며,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첫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막내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주요 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1922년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이듬해 사직했다.

 1937년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빙허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장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1948년 3월 14일 삼오당 감소운이 발의를 하고 이윤수,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 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웠다

 

 

 

 

길바닥에는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가 새겨져 있다.

 

 

 

대구 계산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한국 3대 성당으로 꼽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영남 천주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성당 내부의 모습

 

 

 

계산 성당은 고딕 양식인데도 아담한 느낌을 준다.

 

 

 

독립운동길인 청라 언덕길

 

 

 

선교사 챔니스의 주택이였던 장소가 박물관으로,뒷쪽 건물은 제일교회

 

 

 

의료 선교박물관 내부의 모습

 

 

 

동산병원 100주년 기념 종탑

 

 

 

박태준 선생의 노래비

 

 

 

붉은 담쟁이덩굴로 뒤덮힌 독립운동길

 

 

 

인도에 세워져 있는 3.1 독립운동발원지 표지석 - 2011년 10월 27일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 당시 나라를 잃은 국민이 해야할 책무가 무엇이며

지조와 애국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일제에 대한 자항적 서정시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의 저항적 서정시를 남겼다.

이상화 시인은 위암으로 1945년 4월 15일 사망할 때까지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 시인이었다.

일본인 형사를 앞에두고

벌건 화로를 양손으로 잡고 담배를 문 얼굴에다 들이대고

담뱃불을 붙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상돈 선생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최초로 실시한 인물로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에 빚을 지웠을 때 남자들은 일체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패물을 팔아 빚을 갚자고 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해외 한인들에게 까지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두 분이 사셨던 저택이 바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 시인과

조선 백성들의 힘으로 나라의 빚을 갚고자 한 서상돈 선생은

진정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