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일본 전투기를 상대로 맹활약했던 미국 용병 전투비행단과 청천백일기 표시가 그려진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B 토마호크 전투기
1941년 12월 일본의 갑작스런 기습으로 커다란 재난에 직면했던 미해군의 근거지인
진주만에서는 320여기의 미군 항공기들이 제대로 날아올라보지도 못하고
대부분 지상에서 격파되었는데 이중에는 62기의 P-40B와 11기의 P-40C형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처참한 상황을 겪어야 했던 미 공군이 P-40 전투기를 사용해서
중국 전선의 일본군에게 통쾌한 복수를 감행했던 비행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미국인 용병 전투비행단 플라잉 타이거스였다.
중국 쿤밍(곤명)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던 이 전설적인 비행대는
중국공군을 위하여 자원한 미국인 용병 조종사들로 구성된 부대로서
중국정부가 영국으로부터 원조형식으로 구매한 P-40B 100여기를 사용하여 위세를 떨치면서
일본 육군 항공대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영국 공군은 이 전투기의 P-40B 형과 P-40C형 기종을 토마호크 라고 불렀다.
또한 미군이 사용한 P-40D 형과 이후 최종생산형까지의 기종은 키티 호크 라고 불리웠으며
P-40E형은 워호크(War Hawk) 라고 불렀다.
마치 사나운 상어이빨 같은 그림을 그려놓은 형상은 외관상 보기에도 퍽 강인한 느낌을 준다.
1937년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군은 침략의 여세를 몰아서 상하이점령으로 난징까지 쳐들어갔다.
중국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해주던 미국은 공군 수송기의 중국에 대한 원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한관계로 상하이, 홍콩, 하이난섬까지 함락된 해안도시로의 접근을 할수없었다.
일본군이 장악한 각 비행장에서 발진되는 전투기의 공격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서부 깊은산중의 내륙도시로 버마루트를 통한 기나긴 산악도로를
미군 GMC 트럭을 이용하여 육상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일본공군의 극심한 공습에 무방비였던 장졔스의 중국국민군 정부는
일본공군의 공중폭격에 미국으로부터 공군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로인하여 미국은 용병의 형태로 퇴역공군 조종사들을 파견시킨다.
이들은 플라잉 타이거[Flying Tiger]라 불리웠다.
그들 중에는 미국공군에서 퇴역후 서어커스 곡예비행을 하던 조종사도 있었으며
비록현역에서 물러난 조종사들이었지만 모두 관록과 경험이 뛰어난 쟁쟁한 베테랑 조종사들이었다.
중국 장졔스 주석의 부인이었던 송미령 여사는 국고와 중국 부호들의 모금으로
P-40S 전투기를 미국에서 사다가 플라잉 타이거 편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중국 쿤밍에서 자리잡은 기지에서 일본군의 제로기 사냥을 시작한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영국공군의 112 전투비행대대가 사용한 상어 아가리 도색을 도입해서 사용했었는데
이 비행대의 전설적인 행적으로 인해서 오히려 상어 아가리 (Shark Mouth)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 전투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상어 아가리는 이 부대의 상징적인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 부대는 P-40의 가속력이나 상승능력, 선회능력이 명백하게
일본의 일선 전투기들에 비해서 뒤떨어진다는 클레어 센놀트 비행단장의 지적에 따라서
일본기들과의 근접 선회전은 피하면서 P-40의 강점인 견고함과 신뢰성,
그리고 강하시의 우수한 속도를 이용한 일격 이탈전법을 사용하여
일본군의 Ki-43 하야부사나 제로와 같은 상승률이나 선회성능이
우수한 전투기들과의 공중전에서도 예상외의 큰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6월까지 약 8개월여의 짧은 기간동안 이 용감한 용병 비행대는
15명의 조종사만을 잃으면서 286기의 일본기들을 격추하여 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했다.
총 16기를 격추한 최고 에이스였던 로버트 닐을 비롯하여 후에 유럽과 태평양에서 명성을 날리게되는
짐 하워드나 그레고리 페피 보잉턴과 같은 많은 에이스 조종사들이
플라잉 타이거스의 P-40으로 그들의 화려한 경력을 시작했던 것이다.
플라잉 타이거즈가 사용한 샤크마우스의 P-40 워호크 전투기들이야말로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에 미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용기를 주었던 불사조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 기체에 대한 평판이 어떻든 간에 P-40은 분명 2차대전의 주역중 하나였다.
비록 머스탱이나 썬더볼트가 받았던 화려한 인기나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지만
P-40이 없었다면 미국은 전쟁초기 상상하기조차 싫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4000기 이상의 P-40이 생산되어 많은 전선에서 맹활약했으며,
이 튼튼한 전투기는 비록 최고의 전투기는 아니었지만
연합군이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나마 부족한 전투기의 숫자를 메꿔내며
악전고투의 상황속에서도 끝까지 적군을 물고늘어져 전선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던
최고의 차선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준 전투기 였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중국 쿤밍(곤명)에서 활약했던 상어 아가리가 그려진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B 토마호크 전투기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럽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어 전투기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영국공군은
미국에 전투기 구매를 나선다.
당시 미국에 파견된 영국의 무기 구매 사절단은 P-40의 우수한 저공 비행성능에 만족을 표시하고
대량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미육군 항공대가 단지 131기의 P-40B를 발주한 것에 비해서
영국공군은 1940년까지 무려 1041기의 P-40B를 황급히 구매한후
토마호크 Mk. IIA/IIB라고 명명하여 제공전투를 전담하고 있었던 자국산 주력전투기인
스핏화이어와 허리케인의 보조 전력으로 채용하여 주로 지상공격과 근접지원의 임무에 투입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전투기들 중 100기가 영국이 구매했다가
중국으로 되파는 형식으로 중국의 미국인 용병 비행단 플라잉 타이거즈에 보내진 사실이었다.
사실 미국 정부는 중국에게 전투기를 직접 지원하는 경우 일본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에게 이 기체를 중국으로 되 팔도록 물밑 협상을 해놓았다고 한다.
이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영국은 스탈린에게 전투기를 원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146기의 P-40B를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소련으로 보냈으며
이후 49기의 기체를 더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결과로 인해서 P-40은 영국공군의 주요 전장이던 서유럽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에 더하서 미용병 비행단 플라잉 타이거즈가 활동하던
중국-동남아 전선 그리고 독소전의 무대였던 동부 유럽전선에 이르기까지
개전초기에 전 세계의 광범위한 모든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는 특이한 전투기 였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