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일본군 Ki-21 샐리 중형 폭격기와 중국 충칭 폭격의 희생자들[WW2 Japanese Ki 21 Sally bombing China Chungking Victims ]

슈트름게슈쯔 2012. 12. 18. 21:32

 

 

일본 비행학교의 Ki 21 폭격기

 

구 일본 항공대의 97식 중형 폭격기는 1936년부터 1944년까지 8년간 생산되어

 1형 782기, 2형 1,282기가 양산되어 일본육군의 폭격기로서는 최고 생산량을 기록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미국과 중국과의 보급로 였던 버마로드 폭격에 가장 많은 폭탄을 퍼부은 폭격기였자

중국의 플라잉 타이거즈 토마호크 전투기 편대에게 가장 많이 격추된 일본군의 군용기로 기록된다. 

 

 

97식 중형 폭격기 1형 을(乙)형의 제원


전장 : 16.00m

전고 : 4.35m

전폭 : 22.00m

날개 면적 : 69.60㎡

자체중량 : 4,691kg

최대중량 : 7,492kg

최고속도 : 432km/h - 고도 4,000m

상승한도 : 8,600m

항속거리 : 2,500km

프로펠러 : 해밀턴 2단 가변 피치 3날 프로펠러

엔진 : 나카지마 공칭 1,080마력 공냉복렬성형 14기통

 97식 개량형(=Ha-5 개량형) 쌍발식

승무원 : 7명

총생산량 : 2,054기

무장 : 7.7mm 기관총 5정, 폭탄 1,000kg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97식 중형 폭격기는 야전에서의 우수한 성능으로 인하여

 일본 항공대 병사들에게 신뢰성이 매우 높았다.

 또한 전쟁 초기에는 폭격기 가운데 빠른 속력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중형 폭격기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적재능력은 빈약했다.

그것은 일본 폭격기들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1식 육상공격기도 연료탑재량의 반만 줄여도 연합국 쌍발폭격기

 이상의 방어력과 폭장능력을 가질 수 있는 설계였다

그러한 관계로 전투기를 중시한 일본육군의 전술에 의해

Ki-21 중형 폭격기는 해군의 육상 공격기들 만큼 성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 항공대의 Ki-21 중형 폭격기는 종전까지

일본군이 낙하산 부대와 수송 및 다방면으로 활용했던 폭격기였다.

 

 

 1식 육상 공격기가 솔로몬 제도 방면에서 1회 출격 시 절반 이상이

미귀환기로 기록되는 상황에서 97식 중형 폭격기는 어느 정도 방탄 및 방어무장을 강화하여

전투기의 엄호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충분한 생존능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충분히 폭격기로서 완성도는 충분했다고 볼수있다.

또한 그 속력도 2형의 경우 478km/h로 1식 육상 공격기보다 훨씬 빨랐고 무장도 강했다.


사실 항공대에 있어서만큼은 일본육군이 일본해군보다 월등했던 것이,

일본해군이 소수의 국지전투기 - 라이덴, 시덴 등 - 을 제외하고

오직 제로센으로 밀어붙여야 했던 것과 달리

일본육군은 임무에 따라 하야부사, 히엔, 하야테, 히엔 改, 토류 등

나름대로 견실한 항공운영 능력을 발휘했고 해군보다 훨씬 빨리

 초기에 거의 모든 주력 전/폭격기에 방탄 장비를 설치했다.

 이런 개념적인 일본 항공대의 발전방향을 정리한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 수상이었던 토조 히데키 였다. 

 

Ki-21 중형 폭격기는 2차 세계대전이 경과한후 차례차례 전선에 투입된 100식 중폭격기 탄룡(呑龍)과

 4식 중폭격기 비룡(飛龍)에게 최일선기의 자리를 내어주고

장거리 정찰 및 야간 폭격등의 제2선급 임무에 투입되게 된다.

 


그리고 일본육군 최후의 공수부대 작전인 의(義)호 작전에 투입된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계속되는 미군 B-29의 공습을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B-29 비행장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B-29 및 비행장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하늘에서는 미 공군의 B-29 폭격기를  도저히 요격시킬 수단이 없었으니,

B-29 폭격기가 지상에 대기하고 있을 때 폭파시켜 보겠다는 궁리 끝에 나온 대책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전원 집단사살인 옥쇄를 하였다.

미군의 오키나와 비행장에 투입된 8기의 97식 중형 폭격기는 동체착륙까지 감행하여

미 비행장에 돌입하여 9기의 미 공군  B-29 폭격기를 확실히 완파시키고 30여기를 파손시켰으며 

 미군 20여명 사살시키고 7만 갤런의 항공연료를 태워 없애는 전과를 올리고 1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69명이 전원 전사했다.

 

 

 

동인도 제도 부루섬에 위장한 일본군의 Ki 21 폭격기에 투하되는 미 공군의 낙하산 폭탄 - 1944년 10월 15일

 

 

 

중국 충칭시를 폭격하는 일본 항공대의 미츠비시 Ki-21 샐리 폭격기

 

 

 

일본군 폭격으로 파괴된 중국 충칭시의 민간인 가옥 - 1938년 9월

 

 

 

일본군의 중국 충칭 폭격으로 집을 잃은 중국 민간인들  - 1939년 5월

 

 

 

일본군에 폭격 당하는 중국 충칭시 - 1941년 7월

 

 

 

일본군의 폭격에 희생된 중국 민간인들 - 1941년 7월 5일

 

일본군의 1941년 7월 5일 폭격으로 중국 충칭시의 민간인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내륙의 충칭은 11월부터 안개가 심하게 끼고 이듬해 3월에 걷히므로

 이 다섯 달 동안 일본비행기는 폭격하고 싶어도 폭격할 수가 없었다.

일년 내내 춥지 않기에 농작물의 성장에도 유리하여 하늘이 내린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중국어에서 쓰촨을 “天府之이라고 부른다.

중국을 거진 잃어도 쓰촨만 지키면 우리는 침략자를 몰아내고 잃어버린 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하이, 난징, 우한, 창싸 등을 차례로 다 잃어버린 이때 장개석은 아마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항일전쟁기간 쓰촨은 나라에 병사 250만 명과 노동인력수백만 명을 지원했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8200만 섬 이상의 곡식을 공급했는데 당시 전국 곡식징수총량의 31%였다.

중국에서 충칭 대폭격은 난징대학살과 함께 일본이 저지른 만행으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인재압살을 목적으로 고등학교들을 대거 폭격했으므로

장개석은 점령구의 대학들을 충칭과 내륙으로 옮겼고 망국노가 싫은 사람들은

무작정 충칭에 모여들어 이때 충칭시의 인구는 100만 명에 육박했었다.

한 미국신문은 이렇게 당시의 충칭을 묘사했다.

“자그마한 3층 집에 여러 지방의 말씨를 사용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함락된 도시에서 편안하게 살수 있었지만 그들은 망명정부를 따라 다녔고

불편한 생활조건으로 자식들이 병들어 죽어가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1941년6월5일, 낮에 공습을 피해 교외에 나갔던 시민들이 금방 돌아왔는데

 이날 일본은 관례를 깨고 저녁에도 공습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사람들은 십팔제, 석회시와 연무정 세 곳의 입구로 “口大隧道 방공호”에 밀려들었다.

세시간 이상 지속된 폭격에 조명설비가 고장 나서 방공호는 깜깜나라가 됐고

방공호의 최대 용량은 6500명이었지만 살고 싶은 사람들이 대구 방공호에 밀고 들어와서 비극이 발생했다.

6월의 무더위에 통풍설비가 가동되지 않았고 안에서 문을 열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밀려들어서 문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사후에 밖에서 문을 부수니 방공호천정까지 주검이 쌓여 있었다….

당국은 트럭 20대로 밤낮 하루 동안 주검을 실어냈는데 적어도

이날 폭격에서 무고한 시민 1만2천명이 질식사했다.

 
1941년8월30일, 이태리의 주중대사가 일본에 장개석 관저의 위치를 고자질했고

  27대의 대형 폭격기가 당시 장개석이 거주하던 황산관저를 겨누고

 우박처럼 폭탄을 퍼부었는데 장개석은 그때 한 군사회의를 사회하다가

경호원에게 이끌려서 방공호에 대피했었다.

이에 앞서 1939년12월에 일본은 장개석의 고향인 펑화를 폭격했는데

그때 장개석의 조강지처 마오푸메이가 사망했다.

 이때 팔로군은 일본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히며 항일 근거지를 확보했고,

 일본군은 근거지 주위에 수많은 토치카를 설치하여 팔로군에 대응했는데

바로 장개석이 이전에 홍군을 대장정에로 핍박했던 “수롱(囚籠: 죄수가두기)전략”이었다.

종횡으로 교차된 철로망과 도로망은 “수롱”의 “기둥”과 “쇠사슬”이었고

일본군은 이런 교통선의 빠른 기동력으로 근거지를 잠식하면서 공산군을 소탕했다.

 
1940년8월, 팽덕회는 팔로군 104개 연대(20만 명 규모)를 투입하여

 종횡으로 수천 리에 달하는 일본군의 교통망을 공격했는데 “백단대전”이라고 부른다.

5개월 동안, 팔로군은 1,820 차례 이상의 전투를 치러 철로 940킬로미터,

도로 1500킬로미터를 파괴했고 일본군 2만1천명을 사상했다.

절반 이상 일본의 군사력을 공산군의 근거지에 묶어두고

국민들에게 팔로군이 항일전쟁의 주력이라고 각인시키는 효과를 보았지만

모택동은 너무 일찍 공산당의 군사력을 드러냈다고 근심했는데

훗날에 발생한 “완남(皖南) 사변”은 모택동의 지적이 적중했음이 증명되었다.

 백단대전의 첩보를 듣자 장개석과 국민당의 관리들은 난리가 났다.

 “공산당이 화베이에 100개 연대가 있다니? 산둥의 군사력까지 합하면 그 수량이 어딘데? ”

물론 장개석은 관례적으로 모택동에게 축하전보를 보냈지만

 그 자리로 군사회의를 열고 공산당토벌을 배치했다.

 사실 전반 항일전쟁기간 국민당은 공산당토벌을 병행했고

공산당도 항일하면서 국민당의 토벌에 대한 방비를 늦추지 않았었다.

1940년4월, 송씨네 세 자매가 함께 충칭에 나타나 부상자를 위문하고

 고아원과 학교를 시찰하여 국민과 세계를 대상으로 당국의 확고부동한 항일의지를 전했는데

왕징웨이 난징괴뢰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고 할 수 있다.

 4월18일 송씨네 세 자매는 라디오를 통해 대미국 연설을 했다.
 먼저 송경령이 ‘일본은 석 달이면 중국을 항복시킨다고 했지만

 

현재 중국은 3년째 일본과 싸우고 있으며 일본이 물러갈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연설했고

  이어서 송애령이 ‘왕징웨이는 현재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고,

머지않아 꼭 세인의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매섭게 질책했다.

 나중에 송미령이 연설했다.

  “미국 국회는 일본에 대한 석유운송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중국이 일본의 무력에 정복될 경우, 국회의 여러분께서는 그 결과를 생각해보셨는지요?

  일본은 꼭 중국의 영토와 인력을 이용하여 인도지나, 버마, 말레이반도,오스트레일리아 등

  지역을 침범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것입니다. ”

과연 얼마 후에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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