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소련에서 본국으로 귀환된 독일군 전쟁포로의 가족 상봉[The return of German prisoners of war from the Soviet captivity]

슈트름게슈쯔 2013. 7. 22. 12:18

 

 

 독일군 전쟁 포로들을 파괴된 키에프 시내로 행진시키는 소련군  

 

 

 

모스크바에 된 독일군 전쟁 포로들 - 1944년

 

 

 

모스크바의 서독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 - 1955년 5월 14일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으로 만들었던 서독의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은

 1955년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2차 세계대전 종전후의 나머지 문제였던

독일군 포로들의 본국 귀환문제를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회담으로 해결시키는 성과를 이루어 냈다.

아데나워의 노력에 의해 1년후  독일 민간인 억류자및 독일군 전쟁포로들의 일부인

1먼 5천명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소련에서 방면되어 화물 열차편으로 독일 프리틀란트 근처 캠프에 도착한 독일군 전쟁포로들 - 1956년

 

 

1955년 5월 5일 서독은 연합국과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주권을 정식으로 되찾았다.

그리고  서독 아데나워 총리는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독일군 포로들을 본국으로 귀환 시키기 위해

1955년 9월 8일 역사적인 소련 방문으로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내렸다. .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과 만난 소련측은 서독에게 자국과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서독 내부에서는 2개로 분열된 조국과 그리고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문제를

고착화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전쟁포로기념일까지 만들 정도로 시베리아에 끌려간 동포들의 귀환에 노력하던 아데나워는

소련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독-소련 정상회담에서 소련은 아무런 조건 없는 국교수립을 요구했고

서독의 아데나워는 전쟁포로 해방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자 서독-소련 회담은 점차 경색되어갔고  거친 발언들이 오고 갔다.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은  [독일군들은 소련 민간인들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는 

야만행위를 저질렀다] 라고 비난했다.

이에 아데나워는 [붉은 군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라고 당당히 맞섰다.

이에 소련측은 소련내에 생존해 있는  독일군 포로가 없다는 시침 떼기 작전으로 전환했지만 

협상 결렬을 무릅쓰고 예정보다 일찍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겠다는

아데나워의 완강한 태도에 결국 굴복하게 된다.
1955년 9월 12일 소련은 포로 송환을 약속하였고 양국간의 국교 정상화 협상은 타결되었다.

그리고 1년후 당시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독일군 포로중의 일부는 귀환되게 된다. 

1956년 독일 민간인과 독일군 포로 1만 5천명은 본국으로 귀환되었다.

러시아 내의 독일군 포로들이 終戰(종전) 10여 년이 지나서 귀환하는 바람에

 남편이 죽은 줄 알고 再嫁(재가)한 부인들의 가정이 파탄 나는 등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외 많은 독일군 포로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 억류되어 있어야 했다.

 

 

 

 

12년간 전쟁 포로가 되어 소련에 억류되어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처음 보며 울먹이는 딸  - 1956년

 

 

이 독일군 포로가  딸을 처음 보았던것은 12년 전인 1살때 였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