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소련군의 대두아였던 세미욘 콘스탄치노비치 티모센코 원수[WW2 Soviet Union Big Head Marshal 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

슈트름게슈쯔 2013. 8. 8. 14:27

 

 

 

미국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던 소련군 장성 세미욘 콘스탄치노비치 티모센코

 

 

 

티모센코(왼쪽)와 게오르기 주코프

 

 

 

 

세미욘 콘스탄치노비치 티모센코 (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  : 1885~1970)

 

 

 

한국의 개그로 특별히 공부도 잘하지 못하면서

대가리만 엄청나게 큰 사람을 가리켜 특공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류 역사상 머리가 매우 큰 대두아로 대뇌의 용적이 컷던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가장 큰 대두를 가진 사람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39년 핀란드를 침략하여 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던

소련군의 지휘관 세미욘 콘스탄치노비치 티모센코는 당시 대머리였지만

매우 큰 대두를 지니고 있었던 소련군의 지휘관이었다. 

티모센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핀란드의 겨울전쟁시

스탈린의 소련군 사령관으로서의 발탁으로 핀란드와의 2차 겨울전쟁에서는 

 

승리하지만 이후 독소전쟁에서는 연전연패하며

대단히 멍청한 지휘관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에게 숙청 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되며

시대를 잘 타고 났지만 능력은 그리 신통치 않았던 용두사미격의 인물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 사령관  세미욘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센코는

우크라이나 오데사 근방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국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붉은 군대에 가담하였고, 1919년에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러시아 내전 때 그는 여러 전선에서 싸웠는데, 차리친 전투에서 스탈린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1920-1921년에는 세미욘 부됸니 휘하의 제1기병군에서 근무해서 소련-폴란드 전쟁에도 참전했다.

스탈린이 권좌에 오르자 그와의 친분 때문에 빠르게 승진했고, 대숙청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이후 1940년 보로실로프가 지휘한 소련군이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에게 참패하자,

그를 대신해 지휘를 맡아 핀란드군을 격파했다.

 대단히 큰 머리통을 가진 소련군 신임 사령관 티모센코는

머리통이 커서 대뇌의 용적량이 큰 만큼 그리 두뇌가 명석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유능한 장군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임자들 처럼 완전히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상대에 비해 5배 이상의 전력을 투입하여 패하지 않을 정도의

평균적인 작전 구사능력이 있었던 보통 인물이었다. 

그 만큼 겨울전쟁 당시 초기 소련지휘관들의 무능은 대단하였다. 

스탈린은 티모센코를 레닌그라드 지구의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메레츠코프는 그 휘하에 두었다.

그는 명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평균은 되는 장군이었기에 적어도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학습효과 정도는 아는 인물이었다.

기본적으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만네르하임 라인을 돌파한 후 전과확대에는 생각이 같았지만

 대신 소련군 병사가 어떠한 혹한에서도 효과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치밀한 준비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침공군의 병력은 약 90만 명까지 증강되었고

훈련 역시 평시 소련군답지 않게 치밀하게 이뤄졌다.

티모센코 대장은 전선 후방에 만네르하임 라인의 방어시설 및 핀란드 지형과 유사한 곳을 골라

 공세의 선봉에 설 제123사단 및 제 35전차여단으로 하여금 반복적인 전선 돌파 훈련을 시켰다.

당시 훈련 내용을 살펴보면 전차병들은 진격 시 보병 공격으로부터 취약한 옆구리를 노출한 채

전투하지 말고 후속 보병들이 도착할 때까지 현 위치에서 대기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전차 간의 상호 엄호를 통해 핀란드군의 대전차 특공조와 대전차포를 견제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 혹한의 핀란드 지형에서 보병의 도보 이동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강철제 방탄판으로 보호되는 대형 썰매를 대량 생산하여 전차가 뒤에서 밀거나 견인하도록 조치했다.

 아울러 스키로 이동하는 돌격 공병대가 공격전 핀란드군의 대전차 장애물 및

 지뢰들을 사전에 제거하는 훈련을 받으면서 소련군은 점차 현대식 동계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티모센코 대장은 추가로 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군수품과 탄약을

 전선 주요 지역마다 배치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소련군이 노리는 것은 소모전이었고  이는 핀란드 군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는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소련군의 지휘를 맡아서 핀란드군을 격파시켰다.

그는 이후 소련의 원수 자리에 오르고, 국방장관이 되어 다가오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소련군의 전투력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독소전쟁 개전시 티모셴코는 국방장관이었다.

 소련의 각 정보망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계속 알려왔으나,

스탈린은 히틀러가 양면동시전쟁을 벌일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티모센코와 총참모장 주코프는 스탈린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대비하도록 노력했다.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중앙전선군을 맡아서 페도르 폰 보크가 지휘하는 독일 중앙집단군과 대결하였다.

 겨울전쟁에 앞서 몽골국경의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대를 괴멸시킨 게오르기 주코프도 있어으나

 그는 개전시 총참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야전지휘에는 나서지 못했다.

그나마도 독소전 초기 소련 장성들 중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다고 주로 평가는 받았다고 하지만

소련군의 전쟁 대비태세가 불충분한데다가 당시 독일군은 실전경험이 뛰어났다.


 

티모센코는 원로 장성들과는 달리 화끈하게 민스크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강력한 편제를 만들었다.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가 민스크를 포위하여 병력 40만을 잃었다.

또한 모스크바 앞을 막는 마지막 관문인 스몰렌스크에서도 소련 군대는 독일군에 괴멸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남서전선에서의 포위섬멸도 티모센코가 남부전선군 지휘관을 역임하였을때 생긴 일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의 피해 400만 중 200만에 육박하는 그 손실의 책임은 세미욘 티모센코에게 지워졌다.


 

그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엄습한 강추위의 동장군 기상 무기에 중부집단군이 퇴각하여

 모스크바 수비전의 승리자 주코프의 입지는 대단히 올랐다. 

그에 비해서 3대 포위전의 피해자 아닌 피해자인 티모센코는

스탈린에게서 주코프와는 극명히 대비되는 평가를 받게 된다.

당시 스탈린이 직접 "모스크바 수비전으로 주코프가

티모센코보다 유능하단 것이 증명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비난당했다.

스탈린은 겨울전쟁 초기 패전한 보로실로프를 내치고 이어서 티모센코 또한 내치고 전후엔 주코프도 내치게 된다.


 

이듬해인 1942년 5월, 티모센코는 스탈린의 압박과 하르코프 탈환을 통한 우크라이나 수복 가능성의 확신으로

 62만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작전술적 전차 집단들을 편성하며 이줌 돌출부에서

하르코프를 향해 반격작전을 수행하였지만 독일군 제6군의 파울루스와 제1기갑군의 폰 클라이스트의  

손발이 척척 맞는 작전에 도리어 소련군 공세 부대들의 돌출부가 차단되며 포위당하여 괴멸되어 버린다.

 

 

티모센코는 이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에게 패하여 30만의 인명손실을 내었다.

 이 손실은 후에 청색작전에서의 소련의 방어체계에 큰 공백이 되었다.
결국 크나큰 손살을 발생시키고 완전히 패전 지휘관이 되어버린  티모셴코는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소프스키,바실레프스키,이반 코네프등

젊고 유능한 젊은 장성들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국방인민위원으로서의 직만을 유지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지휘했지만 전투를 눈앞에 두고 에레멘코와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총사령부에서 각 전선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후엔 벨로루시(1946년 3월), 남부 우랄(1946년 6월), 벨로루시(1949년 3월)의 군관구 사령관이 된다.

 1960년엔 명예직이라지만 국방부 고문관을 지냈다.

전쟁 후엔 평탄히 살다가 1970년 모스크바에서 작고하였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