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빨치산의 처형

비운의 소련 여성 빨치산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Soviet Partisan Woman Zoya Cosmodemiyanska]

슈트름게슈쯔 2013. 11. 16. 20:23

 

 

조야 코스모 데미얀스카야의 초상화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1923년 9월19 ~ 1941년 11월 29일)



어머니와 함께 찍은 3살때의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 사진 - 1926년

 

 


소녀시절의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신분증

 

 



조야는 러시아 탐보프 북쪽에 위치한 애스펀 우즈 마을에서 1923년 9월 13일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식 이름으로 러시아어 조이 즉 생명을 의미한다.
조야의 아버지 아나톨리 페트로 비치는 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졸업을 하진 않았고
마을의 도서관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류보프는 학교 선생님으로 붉은 군대의 노련한 인물이었다.
형제로는 1925년에 태어난 그의 남동생 알렉산드르가 있었다.
1929년 조야의 가족들은 박해의 공포를 피하기 위하여 시베리아로 거주지를 옮겼고
1930년에 그들은 모스크바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아나톨리는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조야가 학교에서 좋아한 과목은 문학이었다.
톨스토이,푸쉬킨,바이런,몰리에르,세르반테스,디킨즈,괴테및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여
그녀가 읽었던 작품들에 대한 생각을 노트에 적어 보관했었다.
그녀의 선생님은 피사체의 이미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적은 조야의 에세이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원통형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의 에그몬트와
차이코프스키 5번 교향곡을 좋아했다고 한다.

  

 

 


독일군에게 붙잡혀 고문당한뒤 다음날 아침 교수형장으로 끌려가는 조야


독일군에 의해 목매 달린 조야 코스모 데미얀스카야 - 1941년 11월29일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교수형 장면 유화 - T Kukrynikey


독일군에 의해 교수형 당한뒤 왼쪽 젖가슴을 잘린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

 

 



이 사진은 1943년 10월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를 처형했던 독일군 장교의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유명한 소련 여성 파르티잔 대원이었던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죽음은
지금도 러시아 역사에서 러시아의 영광을 이야기하기에 손색이 없다.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는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에 체포되어
강간과 고문을 당한뒤 교수형을 당하고도 젖가슴이 잘린채 죽었다.
그녀의 처참한 시신은 지금도 한장의 사진이 되어 남아있다.




소련의 탱크 공장에서 제작되는 BT-5 경전차 

BT-5 전차의 포탑에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를 위하여] 라고 적혀 있다. 



모스크바 Novodevichy의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묘지

파르티잔(빨치산)이었던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는 그녀의 사후인 
1942년 2월16일에 소비에트 연방 최고의 명예로운 칭호이자
최고위의 영예등급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이 주어졌다.



모스크바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 기념관의 동상

 

 

 

 알렉산드라 사무센코(1922~1945)

 

 

 

 


 기념관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의 흉상과 소련 T-34/76 전차장 알렉산드라 사무센코의 흉상 

 

 


 

모스크바 지하철에 세워져 있는 조야 데미얀스카야의 동상

 

 

 

 

 


 




 

 

 

조야 코스모데미얀스카야 그녀는 11살 나이에
개척자 단체에 가입하여 소련의 청소년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5살이 되던해 콤소몰(공산당 청년단체)를 졸업하였다.
조야는 소련 청소년 운동의 근본적인 신조를 준수하여 엄격하고 근면하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콤소몰의 지침에 따라 욕설과 음주및 흡연및 금욕적인 깨끗한 생활의 교리를 따랐다.
그녀의 특별한 열정과 그녀가 담당해온 정치 작업의 역할은 젊은 동지들에게 모델격이었다.

1941년 6월22일 그녀의 고향에 독일 육군이 침입했을때 조야의 나이는17살이었다.
그녀는 라디오를 통해 어머니 류보프와 독일군의 공격 소식을 같이 들었다. 
그녀는 모든 소련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우려를 갖고 파시스트 침략자에
대항하는 전투에 기여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녀는 정치적인 작업을 계속하면서 나치가 모스크바에
첫 폭격을 하는 동안에 포병 대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녀는 소련 시민들과 군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위해
작물을 수확하는 협동농장에 자원 봉사로노동 전선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침략 전쟁에 대한 분노로 
자기 자신이 조국에 대한 봉사의 노력이 따라야하는 의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소련이라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동료들과 전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 청소년운동 단체 내에서 그녀가 경험했던 것을 참고 삼아
독일의 침략전쟁에 직면된 조국의 현실에 그녀는 무었인가 기여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붉은 군대 부상병의 치료에 도움을 될수 있도록 희망을 갖고 간호원 과정에 등록하지만,
전선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동안 그녀는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그녀의 교육과정을 마치는 형태는 허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 작전 참가의 역할을 요청했는데  Komsomol의 지구위원회는
그녀에게 Komsomol의 모스크바 위원회 장관과 개인적인 모임을 부여하고 그녀의 지식및 능력과 열정이
그녀가 Komsomol 리더십에 강력한 인상적인 후보로 입증되었다.
이틀 인터뷰 후 조야는 적진의 게릴라전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임무를 받았다.
그녀는 임무가 그녀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과 친구에 대하여 비밀을 유지했다.

 

 

어머니 류보프는 조야의 안전에 대하여 깊은 걱정이 앞섰지만
그녀의 딸이 재치가 있고 젊고 강한 여자라는것을 알았다.

 

 



1941년 11월 중순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까지 쳐들어 왔다.
1941년 11월 16일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펼치기위해
독일군 332연대 197대대는Petrishchevo마을에 캠프를 마련했다. 
조야의 피르티잔 부대는 독일군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다리를 파괴시키며
독일군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며 침략자들에 대하여
최대한으로 전쟁물자의 공급 수송 루트를 저지하며 투쟁하였다.
 
1941년 12월 초의 밤에 조야의 파르티잔 소대는 첫 작전의 일환으로 Petrishchevo마을에
진주한 독일군의 막사에 화재를 일으킬 작전을 전개한다.
조야는 야간 습격을 위해 의복을 따뜻하게 입고 휘발유와 성냥을 준비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젊은 여성임을 숨기기 위해 파카를 입고 모자로 머리를 감쌌다. 
그녀는 마을에 잠입하기 위해 지휘관 역할을 하는 동료 한명과
또다른 파르티잔 동료 한명과 동반적으로 행동했다.
Petrishchevo 도달했을 때 세 동지들은 막사를 나왔고
그들의 개인적인 임무를 완료시키기 위해 출발했다.


조야의 임무는 독일 지휘관에 의해 독일군들이 군마로 사용하는 약 300마리의
말이 있는 창고와 두건물에 불을 지르는 일이었다.

오직 권총 1정만으로 무장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건물로 다가 갔다.
그녀는 외벽에 작은 불쏘시개 더미를 마련한다음 벤젠을 붓고
불을 붙일려고 성냥을 긋기위하여 무릎을 구부렸다.
그러나 그녀가 불을 붙이기도 전에 뒤에 나타난 독일군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저항하면서 권총을 발사하려고 시도하지만
적에서 붙잡히면서 탈출을 하지 못했다.
결국 조야는 독일군에게 붙잡혀 버렸다.



독일군은 체포한 조야를 감금시키기 위하여 지원군을 불렀다.
독일군은 그녀의 손을 뒤로 단단히 결박시킨채
현지 어느 농부의 집으로 이동시켰다. 

독일 경찰은 그녀가 속해있는 빨치산 저항세력의 정보를 얻기위해
끊임없이 고문을 동반한 심문이 가해졌다.
나찌스의 젊은 빨치산에 대한 고문은 중요한 정보를 캐내기위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이름을 수수께끼의 가명으로 말했으며
동료 빨치산들이 믿기어려운 운명에 처한 자신과 같이 고통과 불행의 늪으로 빠뜨리지 않기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는 용감성과 인내력으로 조국을 침략한 원수들에게 결코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경과된후 나찌는 그녀로 부터 정보를 캐낼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참을수 없는 고통의 긴 밤이 지난후 다음날 아침 독일군은 그녀에게 처형을 선고했다.
그녀를 붙잡은 독일군들은 그녀가 입고 있던 무거운 외투와 겉옷을 압수했다.
그리고 그녀는 몹시 춥고 눈이 쌓인 길을 블라우스와 스타킹과 바지를 입은채로 독일군들에게 이끌려
걸으며 마을의 광장에 새로 만들어 놓은 교수대로 향하게 되었다. 

 

 

 

조야는 [가옥 방화범]이란 글이 적힌 플랫카드가 목에 씌워진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에게 교수형이 처해지기 직전 그녀는 사형 집행을 목격하기 위해
모여 풀죽어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용감하게 말했다.

동지들 왜 그렇게 눈을 내리 뜨고 풀죽어 있습니까 ?

파시스트들과 용감하게 싸우고 부수고 불질러 버려야지요! 

나는 죽는게 두렵지 않아요.

위대한 일에 대하여 한명이 죽는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를 생포한자들에게 냉엄한 경고를 했다.

"우리에겐 2억명의 인구가  있다!

너희들은 우리 모두를 목 매달수 없다!


조야는 교수형의 광경이 목격되도록 강요당한 마을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시체는 나치에 의해 총검으로 찔리어 훼손되었다.
독일군들은 조야의 교수형 실행후에도 몇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를 거두어 가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일군들은 은닉해있을 빨치산들을 고려하여 경고로 그녀의 시체를 전시한다.
이미 숨진 그녀의 시체에 독일군들과 그 추종자들은 여러번 구타를 가한다.
1941년이 가고 새해 1942년이 오자 독일군들은 음주 파티를 벌렸다.
술에 취한 독일군들은 이미 교수형을 당한 조야의 꽁꽁 얼어붙은 시체의 옷을 벗기고
시체를 토막내었다.
다음날 독일군들은 소련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이 사실이 드러날것을 우려한 나머지 바로 매장해 버렸다.
그녀의 시신은 교수형을 당한후 독일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 시점인
한달후 쯤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조야의 죽음에 대한 사실은 그녀가 죽은 다음 몇달 동안
시간이 경과된 후에 비로소 소련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먼저 그 마을 사람이었던 타냐라는
여성에 의해 전해들은 프라우다지의 특파원에게 확인되었다.
조야의 동생 슈라는 나중에 조야가 겪었던
사실을 보도한 소련의 신문 기사를 접하고 난후 알수 있었다.
소련의 독재자 조셉 스탈린은 그녀의 고문과 살인의 신문 보도를 읽고
소련 소녀에게 무슨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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