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소돔과 고모라로 간 독일 4호전차[German Pzkpfw Panzer Mark 4 Tank going to the Sodom and Gomorrah ]

슈트름게슈쯔 2014. 3. 9. 14:53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 제 7 기갑사단의 에르빈 롬멜과 쉘부르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장교들 - 1940년 









프랑스 마지노선 언덕밑의 에르빈 롬멜과 321번 4호 전차 -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 당시 마지노선 근처의 롬멜 기갑부대  321번 단포신 Ausf  D형 4호전차 - 1940년 5월 





독일의 침공은 역사의 반복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전략가 쉬리펜이 구상했던 작전과 같이 프랑스가 난공불락 요새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마지노선의 내부에 20만명의 대병력을 가둬놓고 우회전술을 취한 것이었다.

그것은 네덜란드쪽으로 돌아가서 뮤즈강을 도강하고 프랑스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허를 찔러 아르덴느 삼림을 돌파하여 쳐들어간 것이었다.


프랑스로 진격하던 독일기갑부대의 기세등등했던 4호 전차는 22톤의 무게에 

75mm 짧은포신을 장착한 시속40km 의 속력을 내는 빠른 탱크였다.

초기 독일군이 보유했던 4호 전차는 그 수효가 적었지만 공중폭격으로 지형이 변화될정도로 초토화된

 세당과 불타는 루앙시를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온 

에르빈 롬멜은 4호전차가 독일의 주전전차로서의 가능성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독일 육군 기갑부대에 있어서 4호 전차는 당시 무었보다도 독일의 전격전에 알맞는 기동성과 

75mm포의 화력을 동시에 구비하고 있었던 유일한 전차였기 때문이었다.

롬멜의 그 능력은 독일군을 놀라게 했다.

롬멜의 부대는 귀신부대라는 별명이 붙을정도로 여느다른 부대보다 

1주일이란 시간대를 벌어서 먼저 프랑스 깊숙이 쳐들어가서 

영국을 바라보는 도버해협 가까이 진격해서 프랑스 서부의 해안가를 밟았다.


롬멜의 1차 세계대전시 산악전에서부터 뛰어났던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했던 능력을 알아본 히틀러는 

곧바로 롬멜을 아프리카군단 사령관으로 파견하게된다.

그와 같이 군단에 보급된 독일 3호전차와 더불어 독일  4호전차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초반에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승승장구하던 토브룩 함락때와는 달리 

영국군의 기갑 병력과 무기는 나날이 보강되어서 독일군은 곤궁에 빠지게 된다.

또한 롬멜의 전법을 알아버린 몽고메리는 종전처럼 먼저 공세를 취하여 아프리카군단을 공격하진 않는다.


즉 영국으로 부터 계속 병력과 전차를 보급받아 단번에 승기를 확보할때를 노린것이다.


1942년 M4 셔먼 탱크의 등장이후 짧은포신의 4호전차는 약한 철갑탄의 관통력으로 아프리카군단의 열세를 만회할수 없었던지라 

독일본토로부터 지중해를 통해 장포신 4호전차의 보급을 받는다.


몽고메리의 영국군에게 모든 물자와 전차댓수에 열세였던 롬멜은 비로소 장포신 4호전차의 위력에 힘입어 

마지막 승리로서 영국군을 아람하르파야고개 전투에서 격파시켰다.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동부전선의 전세가 점점 나빠지고 영국군의 

독일수송선에 대한 집중공격으로 인하여 지중해의 보급이 어렵게 되어버렸고 

독일의 모든 에니그마 암호가 영국 브래칠리파크에서 해독되어 버리는지라 번번히 패배를 해야만 했다.

즉 독일군의 작전 상황과 움직임을 영국이 미리 다 알고있는 입장인지라 반격은 아예 불가능 했었던 것이다.


암호가 영국측에서 해독할수있었던 것을 몰랐던 롬멜은 적국 스파이의 활동에 의한 작전계획이 누설된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자와 보급이 고갈된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한때 영국을 이집트 국경까지 몰아내었지만 이제는 도리어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에르빈 롬멜은 1942년 9월 튀니지까지 부하들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려고 전병력을 후퇴시킨다.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비참한 패주를 거듭하던 롬멜은 간염의 병세 악화로 본국으로 귀환되었고 

이윽고 아프리카 군단은 아르니므 대장에 의해 버티다가 결국 전원 항복을 할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독일 4호전차의 아프리카에서의 역사는 독일 아프리카군단과 함께 종결된다.


독일 4호전차는 그 빠른 기동력으로 인하여 전쟁초기부터 말기까지 

늘 독일군과 함께했던 없어서는 안될 철마였던것이다.


또한 4호 전차는 영상 40도의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르던  아프리카 열사의 사막에서 동료들과 생사를 같이 하였고

영하 40~50도 혹한의 러시아 전선에서 땔감에 불을 피워 전차 엔진을 가동시켜야 했던 독일군의 군마였던 것이다.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 3호 전차위의 영국군 포로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4호 전차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페인에 수출되었던 스페인 육군의 독일 4호 전차 



독일 4호 전차는 2차 세계대전중 핀란드,루마니아,스페인등에 몇십대의 소량이나마 수출이 된 바 있다.

또한 터키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주축국으로 전쟁에 참가 시키려고

 3호전차와 더불어 2개 전차대대를 무상양도한 바 있다.

 

전후에는 알바니아, 체코에 수출 된바 있었고 그 중에서 스페인에 수출되었던 4호 전차와

 3호 전차는 모두가 1960년대에 시리아로 매각 되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도 소련제 T-54 탱크로 대체하고 독일에서 구입했던 4호 전차를 전부 시리아에 팔아버렸다.

제3차 중동전 때에 시리아는 과거 4호전차의 숙적이었이기도 했던

 이스라엘 육군의 셔먼 파이어플라이(개똥벌레) 전차와 교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대공세에 시리아는 기갑부대가 거의 전멸되었고 

나중에 시리아 육군은  소련제 T-54 전차로 재무장을 하게 된다.

 처음에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골란고원 전투후  바니야스 고지의 각이 져있는 

고풍스러운 풍모의 시리아군  전차가 독일제 전차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비로소 파괴된 그 전차가 독일 4호 전차였음을 알게 된다.  

즉 4반 세기전 북아프리카 롬멜 아프리카군단을 상징하던 전차였던 것이다.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 육군의 독일 4호 전차와 소련제 T-34/85 전차 




중동전쟁 당시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의 독일 4호 전차대를 격파시킨 이스라엘군의 영국제 센츄리온 전차  















골란고원에서 파괴된 시리아군의 독일 4호 전차 






이스라엘 라트룬 전차박물관에 전시된 시리아군의 독일 4호 전차



이 Ausf . H형 4호 전차는 1967년 소위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 3차전 중동전 당시


 이스라엘군이 시리아군에게서 노획한 독일제 4호 전차 이다.





 이스라엘의 사해 동남쪽에서 자리를 잡고 번성했다는 환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아브라함의 사촌 롯은 여러곳을 전전하며 헤메이다가 백성들을 이끌고 소금 광산에서

 노동을 해주고 그 댓가로 식량을 얻어 먹어가면서 의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롯과 이스마엘등 그의 백성들은 시리아의 전차대와 기마대를 

소돔과 고모라 병사들을 도와서 화공법으로 물리쳐 앗시리아의 침략을 막아준 적이 있었다.


그후에 방탕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란 도시는 타락의 상징으로 

하늘의 심판을 받아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아주오랜 시간이 흐른후에 그 역사는 되풀이 되었다.

이제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이스라엘의 군대에 의해 

다시금 시리아는 그 옛날 벌였던 전쟁과 마찬가지로 롯의 자손들에게 당한 것이다.


 나치스의 유물이었던 병기를 제 3국 스페인과 체코에서 사들여 이스라엘 기갑부대를  격파시키려던 

시리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가동할 수 있었던 독일군의 마지막 남은 4호전차들은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던 사해 동남쪽 밥 엣드라와 누이메라에서 가까운 

골란고원에서 폭파된 채 최후를 맞이 했던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 1977년 5월 마산 3.15회관 개봉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