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일군 발터 회른라인 중장의 칼 자이스 쌍안경 [WW2 German Walter Hoernlein Generals Carl Zeiss Binoculars]

슈트름게슈쯔 2014. 7. 16. 18:18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독일 해군 유보트 작전용 7X50 배율의 


칼 자이스 쌍안경을 목에 걸치고 지도를 펼쳐 공격 루트를 살펴 보는 


독일 육군 발터 회른라인 중장 - 1941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10x50 배율의 칼 자이스 C-310 쌍안경을 목에 걸고 식사를 하는 독일 육군 발터 회른라인 중장 - 1941년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한지 한달후

1945년 6월 24일 독일의 동부 도시 예나에 미군 트럭 수십대가 나타났다. 

그것은 창립 100주년을 1년 앞둔 독일 광학기업 칼 자이스(Carl Zeiss)의 핵심 인력 84명과

 그 가족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차량이었다. 

예나에 먼저 들어온 건 미군이었다. 

그러나 연합국 간 협의에 따라 예나는 소련 점령지로 편입될 운명이었다. 

칼 자이스는 나치 독일에 잠망경과 쌍안경 같은 군수품을 공급하고 

미소(美蘇) 연합국도 칼 자이스 렌즈가 들어간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최고의 광학 기술을 인정받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칼 자이스를 공산 진영에 통째로 내줄 수 없었다.

그래서 주요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서독으로 이식된 칼 자이스 기술자들은 소도시 오버코헨(현재 인구 약 8000명)에서 

새로운 칼 자이스를 세우고 현미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예나의 칼 자이스를 국영기업으로 접수하고 사업을 이어갔다.  

두 개의 독일과 두 개의 칼 자이스는 분단(分斷)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운명 앞에 하나의 기업이 둘로 쪼개졌다. 

이들은 1991년 통합을 선언하기 전까지 공존하며 헐뜯고 경쟁했다. 

세계 60개국에서 상표권을 둘러싼 법정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칼 자이스의 고향 예나가 잃은 것은 핵심 두뇌 80여명만이 아니었다. 

미군은 칼 자이스의 제품 설계도 등 8만부의 서류와 기자재를 트럭째 가져갔다. 

오버코헨에서 새로운 칼 자이스가 출발할 때 약속과 달리 이런 물품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직급에 상관없이 생활비로 150구(舊)마르크가 지급됐지만, 

나치의 노동봉사대 숙소 같은 곳에서 난민과 다름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미국행을 택했다. 

몇몇 박사급 인력들은 자살하기도 했다. 대부분 예나 시절을 그리워했다.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육군 사령관을 예나 칼 자이스의 총책임자로 보낸 소련은 재산을 몰수한 뒤

지역 내 광학 관련 기업들을 칼 자이스 아래로 하나씩 통합시켜 거대 국영기업체를 만들었다. 

명목은 칼 자이스 재건(再建)이었지만, 소련 광학 산업 육성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직원 200여명이 강제노동 명령에 따라 소련으로 연행됐다. 

국영기업 초창기에는 생산되는 제품 모두 소련으로 수출됐다. 

1953년엔 직원 20명이 동독 공안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

예나 공장에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스파이 혐의였다. 

예나 칼 자이스에 남은 직원들은 서독으로 간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1950년대부터 '칼 자이스' 상표권을 놓고 미국과 영국 등 60여개국 법정에서 소송전이 벌어졌다.

 대부분 오버코헨 칼 자이스의 승리였지만, 양측은 '자이스 대 자이스'의 대결에 지쳐갔다.

 결국 1971년 서방국가에선 오버코헨 칼 자이스, 공산권 국가에선 예나 칼 자이스가 

'칼 자이스' 명칭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일부 유럽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선 양쪽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보충설명서를 첨부하는 조건으로 양측 모두 '칼 자이스' 제품을 팔 수 있었다.


칼 자이스는 90년대 중반부터 강점을 지닌 기술력을 기준으로 동서독 사업 부문을 재배치했다. 

1846년부터 렌즈 제조술을 발전시켜 온 예나는 기초 분야인 현미경 사업부와 

의료기기 사업부를, 본사가 있는 오버코헨은 주력 분야인 반도체 사업부와 

산업 측정기 부문을 맡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살아남기 위해 정리해고는 불가피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동서독 마르크화 교환 비율이 1대 1로 정해지면서 

치솟은 동독 지역 노동 비용을 감당할 회사는 없었다. 

예나 칼 자이스 6만명 가운데 3000명만 남았다.  

의지할 것은 역시 기술력이었다. 

카슈케 CEO는 "직장을 떠난 직원들의 자구 노력이 칼 자이스 부활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전직 직원들이 공장 안에 비영리의 기술 재교육 회사를 차리고 기술 교육을 진행했다. 

회사 측은 일자리를 주선했다. 

예나 칼 자이스 전직 직원 중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새로 창업하거나 

광학 관련 중소기업에 취직하고 우리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000년 7월 칼 자이스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칼 자이스가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예나 칼 자이스가 통합 이후 첫 흑자(1000만 마르크)를 기록한 해였다. 

2009~10년 칼 자이스의 매출은 29억8100만유로였으며 

1990~91년 통합 무렵 매출(11억3700만유로)보다 약 2.6배 증가했다. 

직원 수(2만4000명)도 2배 이상 늘었다. 

칼 자이스는 대한민국 삼성전자가 주고객인 반도체 계측 기기 분야에서 

매출과 시장점유율(80%) 모두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