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 항공모함 히류와 소류의 미군 폭탄 피하기 뺑뺑이 술책[Japanese Soryu & Hiryu maneuvers to avoid bombs dropped US Air Force]

슈트름게슈쯔 2014. 8. 6. 16:31



태평양전쟁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공군 B-17 폭격기의 폭탄 투하를 피해 


원형으로 항행하며 도망치는 일본 해군 항공모함 히류 - 1942년 6월 2일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아 대파된뒤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 불타는 일본 항공모함 히류 -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해군 항공모함 히류가 북쪽으로 항진하면서 

요크타운을 공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후

히류를 잡기위해서 접근하고 있던 미해군의 SBD 급강하 폭격기대는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윌머 갤러허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서쪽으로부터 저물어가는 태양을 등지고 일본함대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레이더가 없었던 일본 함대의 대공초계병들은 폭격기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먼거리에서 발견했었다해도 마땅한 대응책도 없었겠지만...)  

갤러허 휘하의 SBD의 일군이 히류의 상공으로 접근할 무렵 야마모토의 명령으로 

상공을 초계하던 제로전투기 3기가 이들을 맞이했다. 

제로전투기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덤벼들었고 결국 2기의 SBD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이 무렵 항모 호넷에서 발진한 SBD들까지 가세하여 

무려 35기나 되는 SBD의 대군을 막기에는 이들의 분전이 너무나 애처로울 정도였다

히류를 식별한 갤러허 대위는 즉시 공격명령을 내렸고 히류 주위에 

작열하는 대공포화속으로 공격 명령을 받은 13기의 SBD 폭격기들이 

먼저 한 대씩 히류를 향해서 떨어져 내려갔다.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히류의 가꾸 도메오 함장은 폭탄을 피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항모를 우선회시켰다. 

이 타이밍이 적절해서 최초의 폭탄 3발은 히류의 주위에 떨어져 

물보라만 일으켰지만 항모 히류가 아무리 빨리 선회를 한다고해도 

이미 가속도가 붙은 상태로 연달아 공격해오는 SBD들의 급강하 폭탄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내 4발의 폭탄이 연달아 정확하게 히류의 전방 갑판으로 떨어졌고 

검은 버섯구름과 함께 대폭발이 이어졌다. 

함상에 남아있던 일본해군의 마지막 함재기들이 산산조각나면서 

사방으로 튕겨나갔고 수많은 승조원들이 그 자리에서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곧 하늘을 뒤덮을 듯한 불길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더구나 히류가 고속으로 선회 중이었으므로 전방 갑판에서 발생한 화재가 계속 뒤로 번지고 있었으며,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열기가 함선을 뒤덮었고 함교의 유리는 폭발의 충격으로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용장 야마구찌 제독도 폭발의 충격으로 함교에 쓰러져 있었다.

상공에서 공격순서만을 기다리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SBD 폭격기의 조종사들은

 이공격으로 히류의 운명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히류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검은 연기 구름으로 인해서 

바로 위에서는 히류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이들은 히류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히류를 호위하던 

전함 하루나와 중순양함 지쿠마, 도네를 차례로 공격했다. 

하지만 하루나와 도네, 지쿠마는 격렬한 대공포화로 저항하면서 

희피기동을 실시하여 큰 피해없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우선 공격목표인 항모를 잡아낸 SBD 폭격기 조종사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작전이 성공했음을 보고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귀환길에 올랐다. 

공격을 마친 SBD 폭격기들이 모두 물러가자 태양이 저물어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불가마가 되어버린 히류의 처절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미드웨이해전 당시 마지막으로 가라앉은 일본의 마지막 항모 히류는 손을 쓸 수 없는 

불길에 휩쌓여 조타력을 상실하고 유령선처럼 북쪽으로 떠돌았다. 

6월 5일 새벽 2시 30분, 야마구찌 다몽 제독은 그의 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히류의  함내에서 발생한 화재는 꺼질줄 몰랐고  화재의 열기로 뜨거워진

함내에서는 크고 작은 연쇄폭발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이 보였으며 점점 히류를 포기해야 할 시점이 임박했다. 

점차 연기가 심해지는 함교에서 야마구찌 제독과 가꾸 함장과 함께 부하들을 불러모아놓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히류와 소류의 사령관으로서 이 두 항모의 상실에 모든 책임을 지고 

가꾸 함장과 함께 히류에 남을 것이다. 

내 말이 끝나는 즉시 전원 퇴함하고 이후 최선을 다해서 조국과 천황폐하를 위해서 봉사하도록 하라. 

전원 퇴함이 완료되면 즉시 어뢰로서 히류를 격침하라.

1942년 6월 5일 오전 5시 10분, 2척의 일본 해군 구축함에서 발사된 어뢰가 항모 히류에 명중했고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히류도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가다가 

어느순간 갑자기 새벽의 태평양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히류의 탑승 인원은 불명이지만 히류의 정원이 1,103명, 제2항공대의 부원이 23명이었다. 

히류의 전사자는 야마구치 사령관, 가쿠 함장 및 준사관 이상 29명, 하사병 387명의 합계 416명이라고 알려졌는데

 함이 침몰할 때까지 시간이 걸려 함내에 갇혀있던 기관과원들이 탈출에 

성공해 표류했는데 기관장 및 34명은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총 퇴함명령을 듣지 못해 소란통에 함내를 있다가 

자신들을 남긴 채 자침명령을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또 2번에 걸친 요크타운호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낸 히류 항공탑재기의

 조종사도 72명이 사망해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상실한 네 항공모함 중 

피해가 제일 커(아카기 7명, 카가 21명, 소류 10명) 일본 항공모함 중 가장 잘 싸운 함이라는 명성을 남겼다. 

 1999년 10월 29일. 미국의 심해조사 회사인 노티코스가 

미드웨이 해협의 바다 밑 4,800m 부근에서 히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공군 B-17 폭격기의 폭탄 투하를 피하기 위해 


원형 서클 항해로 도망치는 일본 항공모함 소류- 1942년 6월 4일 





실제 사진이 존재하지 않아 미국의 노먼 벨 게드스가 디오라마로 제작한 


미 항모 요크타운(CV-5)과 엔터프라이즈(CV-6)에서 발진시킨 


급강하 폭격기들의 공격에 침몰되는 일본 항모 소류 - 1942년 6월 4일 



미드웨이 해전 당시 가장 먼저 태평양에 가라앉은 일본 해군의  항모는 소류였다. 

소류는 오전의 폭격으로 엔진이 정지하고 불길이 함선 전체를 뒤덮기 시작해서 

정오 무렵에는 이미 야나기모토 류사크 함장이 전원 퇴함을 명령한 상태였다. 

야나기모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류의 생존승조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고 

구축함 하마카제와 이소카제가 이들을 구하기위해 접근했다. 

이들이 구조될 무렵 그들은 그들이 존경하며 따르던 야나기모토 함장이 탈출하지 않고 

함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에 야나기모토 함장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몇몇 승조원들이 함장을 구하기 위해서 함교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야나기모토는 단호하게 퇴함을 거부했고 자신은 소류와 운명을 같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나기모토의 명령으로 어쩔수없이 함장을 남기고 모든 생존자들이 탈출했으며,

 야나기모토는 점점 불길에 휩쌓이는 함교에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를 목청이 터져라 부르면서 소류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점점 기울기 시작하던 소류는 6월 4일 오후 7시 13분, 살아남은 승조원들이 안타깝게 쳐다보는 가운데

 이미 전사한 718명의 승조원들과 함께 태평양의 4천미터 깊이의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일부 승조원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어버이를 잃은 자식처럼 엉엉 울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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