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마산 월영동에 있었던 일본군의 7식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대[Korea Masan Woryeong dong Japanese Type-7 11inch 280mm Siege Howitzer ]

슈트름게슈쯔 2014. 8. 16. 21:24



일본 에히메현의 수도 마츠야마 시내에 전시되어 있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7식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의 복제품 



이 복제 공성 곡사포는 일본 NHK 방송의 대하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시바 료타로 원작)의 촬영을 위해 제작 된 것이었다. 

외형이  땅딸막 한 230mm 공성 곡사포의 포신은 장거리를 겨냥할수 없을 것 같지만

러일전쟁 당시 280mm 공성 곡사포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러시아 군대를 사분오열시킨 일본군의 최신 무기였다.

복제품이지만 상당히 정밀한 구조로 제작한것을 볼수 있다.




러일전쟁 당시 중국 랴오뚱 반도 뤼순항 포위(The Siege of Port Arthur, 1904-05)당시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로  러시아 군의  방어 거점을 공격하는 일본군





랴오뚱 반도 뤼순의 위치 - 그 옆의 다렌에는 고구려 요동 반도의 바닷가성 비사성(卑沙城)이 있다.



뤼순항 포위(Siege of Port Arthur)는 러일 전쟁 중기부터 후기까지 일어난 최대의 전투로

 전략적 요충지이던 만주의 여순항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상전과 해상전이었다.  

당시 뤼순항 요새는 청일 전쟁 당시 뤼순 전투에서 단 하루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으나

 러일 전쟁 당시에는 야전 축성의 달인이라 불렸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에 의해 

난공불락 요새로 탈바꿈하여 각종 포와 M1893 맥심 기관총까지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500kg의 포탄을 쏠 수 있는 대규모 280mm 포와 

조명 곡사포, 맥심 기관총, 볼트 액션 소총, 가시 철조망, 전기 담장, 

아크 램프 서치, 라디오 신호 등 갖가지 기술을 이용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러시아군이 주둔하던 남만주 일대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 중 한 곳이 뤼순항으로 그곳은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유일한 극동 부동항으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아나톨리 스테셀 총장이 이끄는 5만 명의 러시아군과 

약 16척 정도의 함대와 승무원들을 갖추고 있었고 뤼순항의 요새 주변에는 

174 고지, 203 고지 등의 언덕이 있어 방어를 더욱 강력하게 하였고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의 주도로 1.5km의 방어 라인에 콘크리트 요새와

 기계 포상 설치 및 참호 연결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1904년 7월 30일 노기 마레스케 남작이 

지휘하는 일본군 육군 제3군 9만 명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뤼순항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203 고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아나톨리 스테셀 총장과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은 즉각 방어를 강화하고 가파른 측면에 거대한 벽을 쌓고 

방형 포루로 보호했으며 다른 고지의 요새로도 참호를 연결했다. 

 러시아군이 방어 태세를 끝내고 203 고지를 난공불락 요새로 만들고 

발트 함대가 인도양을 통과할 시기 1904년 11월 26일 일본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요새에 대한 정면 돌파를 시도하지만 수비대의 포격과 기관총으로 인해

 4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추측한다. 

 11월 28일 오전 8시 30분에 대규모 포병 지원으로 다시 일본군은 고지를 공격해 280mm의 포까지 쐈지만 

러시아군 수비대의 잘 싸여진 대열과 수류탄, 기관총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2월 5일 오전 10시 30분을 가해 다시 대공세를 펼쳐 포격 지원으로 

주변 두 개의 언덕을 함락시킨 뒤 17시 일본군은 무사히 203 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노기 장군의 무리한 작전으로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을 포함해 엄청난 피해를 냈다. 

석유 창고의 화재   팔라다와 포베다 203 고지를 함락시켜 유리한 위치에서

 뤼순항을 내려다 볼 수 있게된 일본군은 280mm의 포와 500kg의 철갑탄, 곡사포 등으로 공격을 시작해

 1904년 12월 5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배수량 1만 960톤의 러시아 전함 폴타바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그리고 12월 7일 배수량 1만 2900톤의 전함 레트비잔이 포탄을 8발이나 맞아 뷔렌 제독이 부상을 입고

 사실상 고철로 변해버렸으며 12월 9일 포베다와 퍼레스비트, 순양함 팔라다, 바얀 등이 파괴되었다.

 곧이어 배수량 1만 960톤의 전함 세바스토폴도 파괴당했으며 

몇 척의 소함정을 제외한 4척의 전함과 2척의 순양함, 그 외 10척의 각종 함정들이 모두 격침당해 버렸다. 

 이 포격은 전함들 외에도 조선소와 시가지까지 이어져 사실상 함정의 수리가 불가능해졌고 

시가를 공황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일본군은 항구 밖 광산에서 순양함 다카사고를 잃었다.

 이후 1905년 1월 뤼순항에서 탈출한 세바스토폴의 선장 니콜라이 에센이 항복했고

 이때 침몰한 여러 함정들은 일본군에게 인양되어 수리된 후 일본군의 함정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전함으로 개조시켰다가 나중에 다시 러시아에 반환한다.





 203 고지의 함락과 제1태평양 함대의 괴멸은 뤼순 전투의 종막이나 마찬가지였고

 이후 수주일에 걸쳐 다른 고지에서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뤼순 요새 사령관 아나톨리 스테셀 중장은 사실상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203 고지 부근의 포대들에서는 수비대가 12월 6일 철수를 시작했고 자연히 주변의 요새들이 고립되어 버렸다.  

12월 7일, 스테셀 중장은 여순 요새 사령부에서 작전 회의를 소집했으나 

뚜렷한 대책이 없었고 203 고지의 함락으로 주요 포대와 보루들이 

사실상 일본군의 정확한 포격 유도 하에 무차별 포격을 당하게 생겼고 부상병들이 속출했다. 

 여기에 일본 제3군은 공병대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 폭약을 장착, 

보루를 기초부분부터 파괴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이제 러시아군은 지하에서부터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12월 15일 콘트라첸코 소장이 전사하면서 뤼순 요새의 방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공병과 포병의 긴밀한 협조 하에 그 동안 숱한 일본군을 살상한 이룡산의 포대가 

12월 28일 함락됨으로써 스테셀 중장은 절망에 빠져버렸으며 

12월 31일에는 송수산의 보루와 포대들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마침내 1905년 1월 1일, 15시를 기해 스테셀 중장은 항복을 결심했다.  

그 시각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주요 포대와 보루가 함락된 러시아군은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막대한 희생자만을 낼 뿐이라는 것이 스테셀 중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영어로 항복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당시 국제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어가 공용어라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항복문서를 든 견습사관 마르첸코는 일본군 제1 보병사단 2연대의 병사들과 조우했고 

곧 항복교섭이 시작되어 일본측 대표로는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러시아측 대표로는 참모장 레이스 대령이 선임되었다. 

장소는 수사영이 되었고 마침내 1905년 1월 2일, 16시 35분 항복 협상이 마무리 지어졌다.





러일전쟁 뤼순항 함락을 배경으로 제작했던  일본영화 203 고지의 포스터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 함락을 배경으로 제작했던 일본영화 203고지에 나오는 일본군의 280mm 공성 곡사포

 

 

 




일제시대 마산 월영동에 일본군이 구축했던 7식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대


사진의 하단부에는 마산요새 병영 연습포대(馬山要塞 兵營 演t習砲臺)라고 적혀있다.




일본 군대가 마산에 진출한 시기는 마산선 철도가 건설되던 1905년 경 이었다.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 육군의 중포병 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로 이전하고, 

1909년 12월 대구 헌병 분견소(大邱憲兵分遺所)가 신마산에 설립되면서 부터였다. 

일본군은 1908년부터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되었고, ‘진해만 요새 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 대대’를 마산으로 이동시켰다. 

그 후 1913년 '진해만 요새 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동을 시키고 

중포병 대대는 해방 때까지 마산 월영동에 주둔시켰다.

당시 월영동 포대에서 일본군은 간간히 7식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의 

포사격 연습으로 마산만 돛섬 너머 삼귀해안의 

구실 지역 해안의 야산에 둥근 원형의 표적을 그려놓은 곳에 포격을 가하였다.





일제시대 마산 월영동에 일본군의 7식 11인치 280mm 공성 곡사포대가 있었던 위치 







photo from : www.cityofar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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