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과 아랍 연합군의 주력 전차들[Yom kippur war during Israeli army MBT Tanks & Arab Allied Forces Army Tanks]

슈트름게슈쯔 2015. 6. 1. 14:31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105mm 빅커스 대전차포 탑재  M50 수퍼 셔먼 전차의 승무원들 -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 당시 105mm 대전차포를 장착시킨 이스라엘군의 M51 수퍼 셔먼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모세 다얀 국방 장관과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여성 총리-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M51 수퍼 셔먼 전차에 탑승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육군 남방군 사령관 아리엘 샤론과 모세 다얀 이스라엘 국방장관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4 셔먼 전차 





시나이 반도 전투에서 파괴된 이스라엘군의 M4 셔먼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골란 고원으로 향하는 이스라엘군의 영국제 센츄리온 전차 - 1973년 




센츄리온 전차 트랙 위에 누워 있는 이스라엘군 병사 












수에즈 운하에 이스라엘군이 설치한 부교를 건너는 이스라엘 남방군의 105mm 주포 탑재 미국제 M48A3 패튼 전차 - 1973년 





수에즈 운하에 설치한 부교를 건너는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60A1 패튼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시 수에즈 운하에 설치한 부교를 건너는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48A3 패튼 전차 - 1973년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60A1 패튼 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군의 소련제 새거 대전차로켓에 격파된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60A1 패튼전차 - 1973년 




제 4차 중동전 욤키푸르 전쟁 당시 파괴된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48A3 패튼 전차를 살펴보는 

이집트의 퍼스트 레이디 사다트 대통령의 부인 지한 사다트(Jihan sadat)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전선의 시리아군 부대를 방문한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과 국방장관 무스타파 틸라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골란고원에서 파괴된 시리아군의 소련제 T-62 전차 - 1973년 






골란 고원에서 파괴된 시리아군의 소련제 T-55 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시리아군의 소련제 ZSU-23 대공전차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을 대량으로 격추시키며 

상당히 재미를 본 소련제 SAM 6 대공 미사일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당시 시나이 반도 전선 이집트군의 소련제 SU-100 구축전차 - 1973년 










 시나이반도 사막에서 욤키푸르 전투 당시 파괴된  이집트군 소련제 T-62 전차의 잔해- 1973년 





 골란 고원에서 파괴된 이스라엘군의 미국제 M48A3 전차와

시리아군의 소련제 T-55 전차 - 1973년 








1973년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욤키푸르 전쟁은 제 4차 중동전쟁및 라마단 전쟁 또는 10월 전쟁이라 일컫는다.

욤키푸르 전쟁은 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됨)간의 전쟁이다. 

 전쟁은 욤 키푸르(유대교의 속죄일) 때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기습하여 시작되었다.

 그 곳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지역이었다.

아랍측은 철저한 보안으로 전략적인 기습을 성공시켰으며 우수한 소련제 무기를 사용하여 

전쟁 초기에는 수에즈 운하의 이스라엘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전진에 성공했으며 

골란고원에서도 우세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동원 병력의 증원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측이 밀리게 되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미, 소 양 강대국의 제안으로 휴전 상태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이후 전세계에 제1차 오일 쇼크를 불러오게 된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인지했을 때,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을 하지말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을 하였다. 

이집트 혁명의 주역 나세르는 1970년 9월 28일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나세르의 후계자가 된 사다트 대통령은 나세르의 동지였지만 대 이스라엘 전쟁에 

집중한 나머지 경제성장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취임한 후, 이스라엘과 조기에 강화를 맺고 안정된 이집트의 경제성장을 구상했다.  

사다트는 먼저 아랍간의 결속 강화에 노력하여 1971년 9월에 시리아, 리비아와 아랍 연방 공화국을 결성하고, 

1972년 4월에는 요르단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PLO를 추방한 요르단과 단교하는 것으로 아랍 맹주의 지위를 강화하고 

같은 해 7월에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국외로 철수시켜 소련의 영향도 축소했다. 

사다트는 미국이 중동 평화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 문제나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분주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1973년 3월, 사다트는 수상을 겸임해서 강압적인 통치체제를 굳히고 이후 

이스라엘에 침공,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유리한 전황에서 그대로 강화에 들어갈 것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아랍의 결속을 굳히고 각국이 이스라엘과 동시 개전해서 

이스라엘 군이 다방면에 대처하느라 이집트 군에 집중할 수 없도록 해야 했다.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과 제휴해 

1973년 8월에는 리비아와의 국가 통합 구상안을 발표했다. 

또,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다시 받아들이고 소련으로부터 최신병기 구입을 진행했다. 

 한편 이스라엘 첩보부 모사드는 사다트의 전쟁 계획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알리고 있었으나,

 이스라엘군 참모부는 사다트가 나세르와 달리 강경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을거라고 판단해서

 이집트의 침공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정세도 변화했다. 

제3차 중동전쟁으로 기습에 의해 전례없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이후에 유지해 온 국제적 동정과 신뢰를 상실했다. 

게다가 이 승리로 중동의 군사적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와 영국은 

아랍의 경제 제재 영향도 있어서 이스라엘에 무기 관련 금수조치를 취했고

 미국도 표면적인 원조를 할 수 없었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에 침공을 결정하고 

욤 키푸르를 공격 개시일로 예정 10월 6일에 만월 작전을 실시한다.  

 1973년 10월 6일, 당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푸르로,

 이스라엘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날이었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 국방군에 대해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에서 격렬한 포격을 실시하고 소방펌프를 이용한 창의적인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을 단숨에 돌파해서 시나이 반도로 진출,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서 초반에 대패를 당했고, 

10월 8일에 있은 이스라엘 측의 반격도 대전차 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 군에게 격퇴되었다.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의 2개 여단 및 11개 포대에 대하여 5개 사단과 188문의 야포로 공격해 나왔다. 

전투 초기에 약 180대의 이스라엘 군 전차가 1,400대 이상의 시리아군 전차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 더해 시리아군 전차대의 장비 우수성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분투끝에 이스라엘 군 기갑부대는 골란 고원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의 일부를 상실하고 

자국령까지 침공당할 위험에 놓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병기를 지원받는 등, 체제를 정돈해서 반격에 나섰다. 

10월 10일부터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시리아군에 공세를 개시해 

시리아군의 일부는 괴멸되었고 일방적으로 방어전이 된 시리아 군은 

시리아 영내로 철수했지만, 이스라엘 군은 수도인 다마스커스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다마스커스를 함락시킨다면 소련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위협 앞에서 정지했다.  

사다트는 원래 점령한 시나이 반도 서부에서 더 진출할 생각은 없고 

이스라엘의 점령이 아니라 시나이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소모전으로 몰고갈 생각이었지만 시리아의 아사드는 사다트에게 시리아의 수도를 구하기 위해

 시나이 반도 서부에서 내륙으로 침공하도록 요청한다. 

 시리아에서 진군을 멈춘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공세에 나섰다. 

시나이 반도 서해안 중앙부에서 격전이 전개되어 이집트 군을 격파한 

이스라엘 군은 10월 16일, 수에즈 운하 중앙부를 역도하한다. 

이로써 이집트 군은 시나이에 고립되었고 수도 카이로 100km앞까지 

무인지경을 질주한 이스라엘 군은 그 위치에서 정지한다.

  아랍 연맹의 참전[편집] 아랍 연맹은 무기 공급과 자금 지원 등으로 이 전쟁에 관여했다.

 어느 정도의 지원이 이루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복수의 정보통에 의하면 이라크는 이집트에 헌터 전투기 소대를 파견했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18,000명의 병사로부터 사단과 수백대의 전차와

미그 전투기를 파견했고 전차대는 골란 고원 중앙부에 전개하여 진격하는 이스라엘의 측면을 공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금융지원을 실시하여 수개의 전투부대를 파견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소수의 부대를 시리아에 파견했으며 요르단은 정규사단을 시리아에 파병, 이스라엘군과 교전했다.

  1971년부터 73년까지 리비아는 미라쥬V 전투기와 약 10억 달러 상당의 지원을 이집트에게 제공했으며 

알제리는 전투기와 폭격기 부대, 무장여단, 전차 다수를 파견했고 

튀니지도 1천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여 나일강 삼각주에 배치했다. 

수단은 3,5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모로코는 3개 여단을 최전선에 파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반격이 성공하자 국제 여론은 정전을 요구해왔고 미국과 소련의 중재로 10월 22일에 정전이 선언되었다.

 이스라엘 사회는 격론에 처했고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모세 다얀에게 비난이 집중되고 여론은 그의 사직을 요구했다. 

1974년 다얀은 골다 메이어 수상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수에즈 도하를 성공한 아리엘 샤론은

 국민적 인기를 얻어 나중에 수상이 되었다. 

 1974년 1월,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에서 병력 철수 협정에 조인했고 

유엔 정전감시단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정전을 감시해 국경에서 순회 경비를 실시했다.  

. 아랍의 주요 산유국들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리비아, 이라크, 이란을 포함한 

산유국이 차례로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발표했고 10월 17일 일제히 석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원유가격을 상승시켰다.

이로써 그때까지 공급과잉 상태로 저가였던 원유가격은 순식간에 4배 이상으로 상승하여,

 세계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73년 10월 15일 부터 24일까지의 시나이 반도 전쟁.  골란 고원 작전  라타키아 전투의 

다이어그램 이 전쟁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위신을 회복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 수립에 나섰고 

1975년 6월 제3차 중동전쟁 이후 8년 만에 수에즈 운하의 통항이 재개되었으며

 양국은 2차 병력 철수 협정에 조인하여 시나이 반도의 비군사화를 진행했다.  

1976년 3월, 시리아가 레바논 내전에 간섭하자 이집트는 대소 우호 조약의 파기를 통고하고 

소련과 결별하면서 미국에 접근했다.

 국내에서는 경제 자유화를 진행시켜 서방진영으로 선회했다. 

 1977년 6월 메나헴 베긴 내각이 이스라엘에 성립하자 사다트는 급속히 접근하고 

11월, 그는 아랍 수뇌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공식 방문해 12월에는 정상회담을 실시했다. 

이에 아랍의 카다피, 하페즈 알아사드 등은 트리폴리 선언을 발표, 이집트를 격렬히 비난했다.  

1978년 9월, 미국은 캠프데이비드로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정상들을 초치하여

 이 회담에서 염원하는 평화협정이 수립되었다.   

1979년 3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워싱턴 D.C.에서 평화조약에 조인하였고 

베긴 총리와 사다트 대통령은 197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중동의 상황은 이란 혁명으로 다시 일변하고, 

1980년 9월에는 혁명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개전했다. 

1981년 10월 6일, 대 이스라엘 전승 기념 퍼레이드 중간에 사다트는 이집트 과격파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의 평화 정책은 후계자에게도 계승되어 이집트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1989년까지 시나이 반도는 모두 반환되었다. 

한편, 시리아의 골란 고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1981년부터 자국령 편입을 선언한 것이 국제적 비난을 받아

 이듬해 2월 유엔으로부터 침략으로 규정되었다. 

골란 고원에 대한 교섭이 시작된 것은 레바논 내전이 수습된 1995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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