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넝마주이[Nungmajui- Korea Resource Recycling collection agent]

슈트름게슈쯔 2015. 7. 4. 14:58



재활용 자원을 수집하여 먹고 살기 위해 눈 내리는 겨울철 길을 나서는 

 서울 남대문지대 넝마공동체 재건대의 넝마주이들 - 1950년대








선거 유세 연설이 끝난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버려진 파지를 줍는 넝마주이 - 1960년대 







1970년대 초 대구의 넝마주이 소년들 




한손에 쇠 집게와 한손에 대나무로 만든 망태통을 든 넝마주이 




 

서울 중구 명동거리의 넝마주이 - 1970년 





파지와 고물을 등짐 바구니에 가득 담아  인도를 걸어가는 넝마주이 - 1973년 서울 종로 YMCA 부근





청소부와 넝마주이 - 1973년 7월 서울 종로 



 넝마주이란  일제 강점기때 부터 1970년대 말 1979년까지 넝마(낡고 헌 옷,이불), 헌 종이, 빈병 따위를 

주워 모으는 사람 또는 그런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넝마주이는 현재 거의 사라진 직업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에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1979년 까지만 해도 거리에 떨어진 종이를 

쇠 부젓가락으로  집어서 등에 맨 대나무를 엮어 만든 

큰  바구니에 집어 넣던 넝마주이를 흔히 볼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 8월 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각을 조종·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5호계획에 따른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에 의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고물행상이라는 지금의 말과는 달리 넝마주이란 말은 

그 당시에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들었다.

그것은 넝마주이들이 대한민국 전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리 좋은 인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50~1970년대에는 이동네 저동네를 돌아다니던 넝마주의들에 의해 

발생한 민가의 절도사건등으로 주민들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파출소로 연행되는 넝마주이들도 종종 볼수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지방에 따라 부르던 넝마주이를 다르게 지칭하며 부르기도 했는데 

경상도지역에선 이들을 넝마주이와 더불어 양아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고물을 주우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지만 

한적한 골목의 여염집 담에 늘어 놓은 빨래나 말린 생선등을 몰래 걷어가기도 했으며 

민간인들이 사용하는 가재도구및 장독대의 식료품등을 도둑질해 가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민가주변을 돌아다니는 넝마주이를 보면 사람들은 거의 도둑과 같은 취급을 하여 

이들이 나타나면 빨래를 걷던지 대문을 걸어 잠그며 경계를 하였다.

실제 수도권 서울의 전지역에서는 넝마주이들로 인한 절도 사건이 잦았다.

1970년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박노식 주연의 [무작정 상경]이란 영화가 있었듯이 

당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젊은이들은 그렇게 어른들과 어린이들에게 냉대를 받던 

넝마주이를 하려고 해도 서울에 아는 사람이나 연줄이 닿아야 그 일을 할수가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고생이 뭔지 젊은 시절부터 너무나 뼈저리게 겪었기에 

자수성가로 열심히 노력하여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넝마주이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빈 골판지 박스와 고물을 줍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photo from : www.museum.seoul.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