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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베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범 공산주의자 청년[Germany Reichstag arsonist Communist Youth Marinus van der Lubbe]

슈트름게슈쯔 2015. 8. 13. 17:11





불타는 독일 베를린 라이히스탁 - 1933년 2월 27일 





방화로 전소된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라이히스탁 빌딩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은 독일 정치사에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독일 국회의사당방화사건은 공산당을 쳐부숴버릴 히틀러의 계락이었다

  국회의사당 방화를 빌미로 제1당 국가사회당 즉 나치당이 

사회 민주당과 공산당 당원들을 대거 투옥시키고 (당시 나치 감옥에는 매일 새로운 죄수가있어 혼잡했으며 

정치 포로는 현재 구금의 임시장소에서 개최되고 있다.) 반대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하면서 

나치스가 독일의 독재권을 차지하기위한 음모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독일 정권의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핵심사건으로 목격자는 근처를 지나가던 대학생이었다.

 그는 1933년 2월2 7일밤 9시14분 독일 의회 건물 의사당을 지나던중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치솟는것을 발견한 것이다. 

목격자는 즉시 화재를 신고했고 베를린 소방대가 의사당에 도착했을때는 

의사당이 이미 걷잡을수없이 불타고 있었다. 

소방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경찰은 불길이 여러곳에서 수직으로 치솟으며 동시에 발화한 것을 발견했다.

 사건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한스 플러터라는 신학도였다. 

그는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 의사당 건물 서남쪽 모퉁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서 플러터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2층 발코니에 뭔가 불타는 것을 손에 들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경찰관에게로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다. 

경찰관은 의사당 현관쪽을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2층의 창문에서 창문으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는 사나이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Marinus van der Lubbe : 1909 ~1934)





레닌의 젊은 시절 이미지와 비슷한 뉘앙스를 주는 


공산주의자 청년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이목구비 4관이 멍청하고 저돌적으로 생긴 용모를 가졌던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경찰은 이상하게도 벌거벗고 건물 뒤에 움츠려 숨어 있던 마리누스 판 데르 루베를 발견했다. 

루베는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실직 벽돌공으로 최근에 독일로 넘어왔다. 

발견 당시 루베는 방화용 도구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당시 국회의장),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 등이

 곧 현장에 도착했고, 화재 현장을 보자마자 괴링은 즉각 화재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선언했으며, 공산당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라고 소리질렀다.   

 아직 화재 진압 중이었고, 괴링의 이 선언으로 화재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방화로 그냥 굳어졌다.

 이때 히틀러와 함께 오페라 감상 중에 같이 현장으로 달려온 

괴벨스 그의 일기에도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쓰여있었다. 

히틀러는 하늘이 주신 기회를 잡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1919년)의 인권 조항 대부분을 폐지하는 

의회 방화에 관한 법령 (비상사태법)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언론 접근이 차단되고, 지도자들이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경찰과 돌격대의 공격을 당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리멸렬하여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공산주의자들과 몇몇 SPD 당원들은  

나치 돌격대 SA가 막아서는 바람에 국회 등원을 할 수 없었다.   

나치 지도자들은 이 의회 방화 사건이 코민테른의 행위로 밝혀졌다고 주장했으며,

 범인으로 나중에 "의회 방화 사건 재판"으로 알려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1933년 3월 초에 체포된 3명의 남자를 내세웠다.   

 베를린 경찰에 따르면, 루페는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방화를 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고문 끝에, 루베는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고,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의회방화사건에 관한 법령에 따라 독일 공산당(KPD)은 그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서

 1933년 3월 1일 국회 등원을 거부당했다. 

이어서 경찰과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SA가 독일 내 모든 공산당 건물들을 장악했고, 

공산당이 쿠테타에 사용할 무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은 나치가 금지한 첫번째 정당이 되었다.   

나치는 자신들의 득표율을 44%까지 올릴 수 있었고, 

그 표들은 나치의 우호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8%를 합쳐 52%로 다수당이 되게 해주었다. 

그러나 3월 선거는 나치에게는 마지막으로 승리한 선거였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나치는 자신들만으로 50~55%의 득표율을 기대했다. 

결국 나치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2/3 이상 다수표를 확보하기 위해 

남은 정당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찬성표를 던지도록 했고, 

그 결과 대부분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류되었다. 

계속되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회민주주의자들만이 전권위임법에 반대 투표를 했다. 

다음 달, 모든 비 나치 정당들은 불법화되거나 체포와 강제수용소 수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해산했다.  














독일 법정에서 고개 숙인 국회의사당 방화범 공산주의자 청년 마리우스 판 데르 루베 - 1933년 




재판에서 판 데르 루베는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10일에 참수되었는데, 

이 날은 그의 25번째 생일3일 전이었다. 

나치는 루베가 공산주의 음모가 집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 음모가 집단이 국회 의사당을 불태우고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나치는 화재 다음날 새벽부터 각지의 공산당 본부를 경찰과 돌격대를 동원하여 

압수 수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봉기 음모를 입증하는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보되었다는 문서"들은 증거로써 재판정에 제출된 적도 없고, 공개된 적도 없다.  

 반면에, 공산주의자들은 루베가 자신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나치 음모단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루베는 어떤 목소리가 나치 체제 하에서 독일 노동계급의 상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의사당을 불태우자고 그에게 말했다면서 단독범행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그로부터 11년후 유럽의 전쟁이 종결된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프란츠 할더 장군은 괴링이 화재 사건에 대해 농담한 것을 진술했다. 

1942 년, 총통 생일 점심 때 일이다. 

그날 총통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제국의회 의사당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괴링이 대화에 끼어들어 소리질렀던 것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진짜 제국의회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다, 

내가 제국의회에 불을 질렀거든.'

 이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뉘른베르크에서 대질심문에서 괴링은 할더의 진술을 들었지만,
그가 화재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거부했다. 

할더의 진술은 넌센스라고 하면서 괴링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제국의회에 불을 지를 동기나 이유가 없다.

 예술적 관점에서, 나는 의회가 불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더 멋진 의사당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난 몹시 속상했다.

 제국의회의 새로운 장소를 찾아야 했던 난 

크롤 오페라 하우스(화재 후 의사당으로 사용됨)를 포기해야 했다. 

오페라는 나에게 제국의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photo from : www.geheugenvannederland.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