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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찐빵 같았던 소련군 장성 바투틴[Soviet red army General Vatutin,s face was like steamed bread]

슈트름게슈쯔 2015. 8. 4. 17:01



니콜라이 표도르비치 바투틴(Nikolai Fyodorovich Vatutin : 1901~1944)












흐루시초프와 바투틴 









바투틴의 장례식 - 1944년 4월말 키예프 




일반적으로 역술가들이 뭇사람들의 관상과 체상울 볼때 

대개 살이 찐 사람들은 성질이 급하고 단명한다고 하며

또한 살찐 사람이 살이 단단하지 못하고 너털너털하면 단명할 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몸은 살쪘는데 얼굴이 야윈 사람은 수명이 길고 성질이 느긋하다고 보며 

반대로 몸이 야위고 얼굴이 살찐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단명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재 대도시의 노인들을 위주로 표본 조사를 해본 결과

야윈 노인들일수록 폐렴과 폐결핵에 잘걸리고 

다소 살이 찐듯한 체형을 가진 사람들이 

폐렴에 잘 걸리지 않고 장수한다는 데이터가 나왔다.

독소전쟁 당시 얼굴의 살집이 마치 진빵처럼 빵빵하고 

나폴레옹 처럼 키가 작았던 소련군 장성이 한명 있었다. 

바로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소련군 장성 바투틴이었다,

하지만 바투틴은 진빵처럼 빵빵한 얼굴에 성인병등으로 요절을 한것이 아니라 

43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총탄을 맞아 입은 상처로 인한 패혈증으로 요절했다. 

바투틴의 작전 계획 방법과 유형, 전략적 기술등은 그의 사후에 소련군에 계승되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업적이 폄하되었던 냉전(Cold War)이 종식되자 

바투틴은 서방 군사 전문가들로부터 재평가를 받았고 

제 2차 대전중 가장 창의적인 지휘관중 한명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1901년 12월 16일 ~ 1944년 4월 14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군 장성이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서 1920년 붉은 군대에 징집되어 

우크라이나의 반혁명군과 싸웠다. 

1921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이후 초급 장교를 하면서 1926년부터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와 참모본부학교에서 고급 군사 이론을 공부했다. 

대숙청을 무사히 넘긴 그는 빠른 승진을 함과 동시에 당활동도 성실히 참여하였다. 

이후 키에프 군관구의 참모장이 되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소불가침조약의 밀약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에서 일하면서 이 침공 작전을 입안했다. 

이 침공작전의 성공에 따라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참모본부의 작전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계속 주로 참모로 일했기 때문에, 그의 작전지휘는 

너무 추상적이며 이론적이었고, 야전 지휘의 경험은 부족했다. 

그러나 그는 빈농출신으로서 자신을 출세시켜준 공산당 활동에 성실히 참여했고, 

이런 성실성은 스탈린에게 눈에 띄어 그의 총애를 받는 몇안되는 군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계속 참모직으로 일했고,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시점에서는 총참모장이었던 주코프를 보좌하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각 전선에 시찰을 나간 주코프를 대신하여

 총참모장 직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재능이 있었으나, 계속 참모직으로만 일하여 현장 지휘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독소전쟁 초기에 몇 번의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패배의 경험을 토대로 학습하여 후에 결정적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분쇄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소련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4년 2월 바투틴은 다시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의 협공을 통해 

카메네츠-포돌츠크 일대의 독일 제1 기갑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한창이던 그때 슬라브타 일대를 시찰하던 

바투틴은 반소 우크라이나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았다.   

바투틴은 게릴라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키예프의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바투틴은 6주간 상처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패혈증으로 1944년 4월 15일에 사망했다. 

의 형제인 아파나시와 세묜도 1944년 2월과 3월에 전사하는 바람에 

바투틴의 어머니 베라는 두 달 사이에 세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아 햐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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