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Air Force

플라잉 타이거스 P-40B 토마호크 전투기의 이륙 - Flying Tigers P-40B Tomahawk Fighter take-off

슈트름게슈쯔 2015. 10. 24. 23:4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쿤밍 비행장에서 이륙(離陸) 발진(發進)하여 내륙 상공을 비행하는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1st American Volunteer Group -AVG)플라잉 타이거스의

 P-40B 토마호크 전투기 편대

 

 

제 2차 세계댜전 당시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1st American Volunteer Group -AVG)가 사용했던

P-40B 토마호크 전투기는 원래 아프리카에 주둔한 영국 공군을 위한 전투기 모델이었다.

이 전투기는 당시에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은 기종은 아니었다.

또한 여기에 딸린 예비부품이 모자랐기 때문에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AVG)는

 항상 정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AVG)는 격전을 치르면서 많은 전투기를 잃었기 때문에,

참전 말기에는 50대의 P-40E 키티호크 신형기를 다시 지원받게 된다.

P-40은 일본 전투기에 비해 운동성이 떨어지는 대신 하강 속도가 뛰어나고,

 견고한 기체에 중무장의 장점이 있었다.

이것은 첸노트의 일격일탈 전법과 맞아떨어져서 플라잉 타이거스가 많은 전과를 올리는 원인이 되었다.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AVG)는 특히 기수를 상어 아가리의 그림으로 채색을 하여

강인한 인상적인 모습으로 전장에 나타났다.

 이는 영국 공군의 112 비행대대(112SQ)의 기수 모양을 모방한 것이었다.

 중화민국 공군 제1미국인 의용 대대 (AVG)는 미국인 후원자들로부터

플라잉 타이거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항구를 대부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륙인 충칭으로 수도를 옮긴 중화민국 정부에게 버마의 랭군 항은

미국의 군사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다.

연합국은 해로를 통하여 이곳으로 군사물자를 수송한 후,

 다시 육로나 공중수송으로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이 수송로를 방어하기 위해

제1,2 비행대대는 윈난성 쿤밍에 주둔하였고,

 제3비행대대는 버마 랭군에 주둔하면서 임무를 개시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첫 전투는 1941년 12월 20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은지 10여일 후 이루어졌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제 1, 2 비행대대는 10대의 일본군 Ki-48 폭격기를 요격하였다.

 이중 4대를 격추하고, 나머지는 폭탄을 버리고 도주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플라잉 타이거스의 손실은 없었다.

일본은 당시 버마의 영국군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고,

버마에 주둔한 플라잉 타이거스 제3비행대대 (총전력 18기)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하였다.

 12월 23일 미쓰비시 Ki-21, Ki-30 폭격기가 나카지마 Ki-27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랭군에 주둔한 플라잉 타이거스 기지를 폭격하기 위해 오고 있었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영국공군과 함께 출격하여 8대의 Ki-21을 격추시켰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피해는 3대였다.

그러나 폭격은 성공했고, 플라잉 타이거스는 지상에서 보유기 몇대를 잃었다.

12월 25일에는 좀 더 성능이 우수한 나카지마 Ki-43 하야부사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Ki-21 폭격기가 접근했다.

폭격기의 수는 63대였고, 호위전투기는 25대였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전투기 12대와 영국공군의 15대는 다시 요격에 나서서 10대를 격추시키고,

플라잉 타이거스는 3대, 영국공군은 5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기지는 다시 폭격당했다.

계속된 전투로 제3비행대대의 소모가 극심하자, 중국방면에서 제 2비행대대가 구원을 왔다.

제 2비행대대는 태국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폭격하였다.

1월 12일, 일본은 전면적으로 버마 전역을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입히지만,

워낙 수적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잉 타이거스의 손실도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2월중순이 되자, 플라잉 타이거스가 가동할 수 있었던 전투기는 고작 10대에 불과하였다.

 또한 영국군은 지상전투에서 패해 랭군을 포기하였고, 플라잉 타이거스도 북부 버마로 기지를 옮겼다.

이들 전투에서 플라잉 타이거스는 50대의 적기를 격추하고 20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랭군이 일본군에 함락된 이후, AVG는 기지를 랭군에서 북쪽으로 300마일 떨어진 마그웨로 옮겼다.

제1,2비행대대의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에, 첸노트는 전력보강을 위해 제3전대도 마그웨로 진출시켰다.

이곳에 주둔한 연합국 전투기는 38대에 불과했으며, 플라잉 타이거스 소속은 8대였다.

이들에 맞선 일본군은 27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중 115대가 전투기였다.

플라잉 타이거스와 영국 공군은 이들과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3월말이 되면 4대의 전투기만 남게 되었다.

3월 23일 플라잉 타이거스는 중국의 Lowing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50대의 신형 P-40E 보충기가 도착하고, 정비를 통해 12대가 다시 전열에 참가하여,

 플라잉 타이거스는 다시 전력을 확충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지를 공격해 온 12대의 Ki-43 하야부사 전투기와 맞서

 4대를 격추시키고 1대를 지상공격으로 잃었다.

한편 이때, 플라잉 타이거스에 대해 버마에서 계속 전투를 벌이는

 연합국 지상군 지원에 참가하라는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플라잉 타이거스 파일럿들은 이를 쓸모없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4월 중순에 이를 거부하는 항명을 하기도 하였다.

첸노트는 이를 진압하고, 계속 지상 지원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마의 전국은 악화되어

플라잉 타이거스는 다시 바오산으로 다시 한번 기지를 옮겼다.

바오산 기지도 일본군에게 항상 폭격을 받았지만,

플라잉 타이거스는 이들을 요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그리고 종종 베트남에 기지를 둔 일본군 항공대를 선제 폭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버마가 일본군에게 완전히 함락된 이후 플라잉 타이거스는 중국방어의 임무를 맡았다.

둘리틀 비행대의 도쿄 폭격 이후,

 일본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기지가 될 수 있는 곳을 제거하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이에 맞서 연합국도 플라잉 타이거스를 를 미국 정규군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육군 항공대 제23 전투비행단이 6월 부터 플라잉 타이거스의 주둔지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최후의 전투는 형양 상공에서 피해 없이 4대의 Ki-27을 격추한 것이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플라잉 타이거스는 해체되었다.

 

 

 

 

photo from : tumbl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