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하르코프 전투 당시의 소련군 T-34/76 전차- Battle of Kharkov during Soviet Red Army T-34/76 Tank

슈트름게슈쯔 2015. 10. 25. 21:41

 

 

하르코프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T-34/76 전차 - 1943년 5월

 

 

 

하르코프 전장으로 향하는 독일 4호 전차

 

 

 

하르코프 시내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군의 T-34/76 전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파괴된 독일 4호 전차옆으로 전진하는 소련군 T-34/76 전차 - 1943년

 

 

 

독일군으로 부터 탈환한 하리코프 시내로 들어오는 소련군 T-34/76 전차대

 

 

 

 

 

스탈린과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나자 즉각 포위 작전에

동원된 병력들을 이동시켜 보다 북쪽에 위치한 새로운 목표로 보냈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군 사령부와 예하

 소총군 중에 제65군과 제21군이 새롭게 편성된 제2 전차군 및

 제70군과 협력하여 보로네시-리브니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으며

 돈 전선군은 중부 전선군으로 개칭되었다.

제16 항공군과 제2 근위기병군단도 이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나머지 돈 전선군의 제24군, 제64군, 제66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재편성에 들어갔고,

바투틴이나 로코소프스키의 명령에 따라 어디에라도 합류할 태세로 대비하고 있었다.

 

확대된 별 작전은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연속적으로 3개의 공세 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1단계로 2월 12일에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이 협격하여 오룔 돌출부의 독일군을 포위한다.
2단계로 2월 17일에서 2월 25일 사이에 이들 2개 전선군이 새롭게 투입된

중부 전선군과 조우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일소하고,

 데스나 강을 넘을 공고한 교두보를 확보한다.

마지막 3단계로 25일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남쪽의 이웃 전선군과 협동하여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공세들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이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성공과 일치되도록 시간을 잡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3월 중순에 드네프르 강 서쪽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세우는 것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로코소프스키의 충격 집단은 부대 재편성에 불과 6일의 시간을 배당받았고,

 전혀 새로운 지역으로 공세를 준비하는 데 5일의 추가적인 시간을 받았을 뿐이었다.

제2 전차군과 제2 근위기병군단은 이미 리브니 지역에 집결했지만,

제70군은 겨울의 러시아 도로를 2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제21군과 제65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으로부터

철도와 도로를 통한 힘든 이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초봄에 내리는 폭설이 이동을 방해했고 라스푸티차 수시로 찾아왔다.

집결지에서 공격 예정지로 이동하는 도로는 이미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북쪽으로는 오직 단선의 철도선 하나만 존재했고,

이미 작성한 시간 계획표는 허구임이 드러나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이 계획에 반대를 표시했지만 별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별별 애로사항 때문에 소련군은 2월 25일 이전에는 공세에 나설 수 없었고,

 25일 당일이 되어서도 제2 전차군과 제65군은 철도 하차점에서 공격 집결지로 이동 중인 상황이었다.

로코소프스키는 2월 25일에 로딘의 제2 전차군과 바토프의 제65군을

선봉으로 내세워 공세에 착수했다.

NKVD요원으로만 구성된 졍예 부대인 타라소프 중장의 제70군과

치스챠코프 중장의 제21군이 도착 즉시 공격에 가담했으나

전력이 완전히 집결하지는 못했다. 양측 야전군은 진흙탕으로 변한

도로에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행군 중이었다.

그 사이 2월 22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의 제13군과 제48군이

 독일 제2 기갑군의 우익을 강타했고,

바그랴먄 중장 휘하의 제16군이 지즈라 북쪽에서 독일 제2 기갑군의 다른 측며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씨와 독일군의 교묘한 방어로 바그라먄의 진격은 방해를 받았다.

2월 24일까지 서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의 성과는 보잘것 없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은 이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제13군의 우측면 엄호하의 바토프의 제65군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독일군 후방까지 돌파해 냈다. 로딘의 제2 전차군과 기병-소총병 집단은

세프스크를 통과하여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를 향해 빠르게 서진을 계속했다.

3월 1일까지 로코소프스키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독일 제2 기갑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남쪽으로는 독일 제2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이때까지 제79군은 전방으로 추진하여 바토프의 우익에서 전열에 합류했으며,

독일군 후방 깊숙한 오룔과 브랸스크로의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3월 7일까지 크류코프의 기병-소총병 집단은 로브고로드-세베르스키의 외곽에 도달했고,

독소전 전체의 동계 전역을 통틀어 붉은 군대 최고의 진격을 달성하게 되었다.

표면상으로 볼때 소련군은 상당한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미

만슈타인의 계략에 의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슈타인을 비롯한 남부집단군의 독일군 수뇌들은 애시당초

소련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직접 막을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가 공세종말점까지 다달아서

더 이상의 돌파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만들어 진격을 돈좌시키고

병참과 보급선을 신장시키고 깊숙히 진격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양 날개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소련군의 출혈을 일으키면서 수행하는 기술적인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만슈타인은 제40 기갑군단의 감청 정보에 기반해

소련군의 공세종말점을 예측하여 전형적인 '기동 방어'(Mobile Defence)를 통해

 소련군을 괴멸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소련군은 진격목표 달성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들어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밀려 패퇴하는 줄로 착각하고 조금씩 함정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포포프 기갑군을 중심으로 한 남서전선군의 병력들은

크라스노아르메이스카야를 넘어 드네프르 강 북안까지 진격하며

계속된 출혈과 늘어진 병참선으로 인해 진격속도가 저하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오룔을 향해 뚫은 로코소프스키의 돌파구는 적진 깊숙한 진격으로 인해

 양익이 허술해지게 되었고 그 옆으로 다른 전선에서 증원되어온

 독일군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돌파구의 퇴로가 막혀버려 포위당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직 스탈린그라드에서 재편성 중이던

 제21군, 62군, 64군을 끌어올려 했지만 이들은 이동 중이어서 투입이 불가능했다.

 한편 라스푸티차로 인해 후속병력들의 공세 집결이 늦어지자

로코소프스키의 진격은 한계에 달하여 결국 목표인 오룔의 남서쪽에서

치열한 저항에 부딪히자 진격을 멈추어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이제 로딘의 제2 전차군을 브랸스크에서 오룔로 옮겨왔지만

도리어 그것은 중부전선군의 좌익과 중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이어 독일 제2군의 여러 사단들이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드디어 벼르고 별려왔던 반격을 시작했다.
그 제1 목표는 만슈타인의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를 줄기차게 위협하며

남부집단군 후방을 휘젖고 다니면서 소련군의 전략기동군(OMG)역할을 하고 있던

포포프 전차군과 포포프 전차군의 후속으로 들어온 제1 근위군과 제6군 이었다.

포포프 전차군은 힘든 진격 끝에 파블로그라드에서 진격이 잠시 돈좌된 상태인데다가

무리한 진격과 보급선의 예하 가동 가능한 전차 전력이 군단급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만슈타인은 포포프 기갑군을 일거에 포위해버리기 위해

막켄젠의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과 북동쪽으로,

하우저의 SS 기갑군단은 동쪽으로, 호트의 제4기갑군 예하 제48 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시켜 파블로그라드 일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2월 20일에 다스 라이히 사단이 파블로그라드 시내에 돌입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22일에는 소련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막켄젠의 제1 기갑군은 북동쪽과 북서쪽의 사단들을 넓게

전개시켜 포포프 기갑군 및 제6군의 포위망을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포포프는 "

우리 군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진로를 차단 중.

"이란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있었다.

막켄젠은 이 전문을 감청하며 낄낄 웃고 있었다.

결국 2월 23일에 이르러서야 포포프는 함정에 빠졌다는걸 깨닫게 되지만만 이미 너무 늦었다.

전선에 합류한 토텐코프 사단은 북동쪽에서 포포프 전차군에 대한 압박을 시작했고

동쪽에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48 기갑군단이

 파블로그라드 동쪽에서 제1 근위군을 강타했다.

남쪽에서는 마찬가지로 제4 기갑군 소속인 제40 기갑군단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만슈타인의 포위가 성공한 것이다.

기갑부대의 맹진으로 포포프 전차군과 제1 근위군, 제6군에 대한 포위가 성공하자

2월 24일 만슈타인은 포위망 안에 갖힌 소련군에 대한 공격 암호 "봄이 왔다.

봄이 왔다."를 발령했다.

명령을 받은 호트와 막켄젠은 포포프 전차군과 제1 근위군을 떡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전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소련군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에서 몰려오는 독일군의 공세에 무너져 갔고

그리하여 제6군, 제1 근위군, 포포프 전차군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북쪽의 포위망이 비교적 약해서 살아남은 소련군이 적잖이 탈출해서

 포로를 9천명밖에 잡지 못했지만 만슈타인이 구사한 한번의 역관광으로

 순식간에 3개 야전군이 사라져 버리고

 소련군 남부전선에는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리고 3월,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 대한 진격을 속개했다.

삽시간에 일어난 역관광으로 소련 포포프 기갑군, 제1 근위군, 제6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도상에서 지워지자 자포로제에서

하르코프에 이르기까지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버렸고

스탈린과 스타브카는 이 엄청난 재앙에 경악했다.

다른 야전군들이 독일 중부집단군 공략에 투입되느라고

정작 하르코프에는 제25 근위소총병 사단과 기타 제대 몇 개 이외에는

다른 수비병력이 없어져 버려 사실상 하르코프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바투틴은 중부집단군 공략에 참여하고 있던

 류발코가 이끄는 제3 전차군을 하르코프에 투입하지만

제3 전차군의 진격로 정면으로 하르코프로 진격하던 하우저의 SS 기갑군단이 가로막았고

측면으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6, 17 기갑사단이 밀고들어왔다.

여기에 덤으로 아직 전력이 온전한 켐프의 켐프 분견군까지 가세하니

제3 전차군은 하르코프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괴멸되고 말았다.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하르코프로 곧장 들이치지 않고

제1 기갑군을 하르코프의 북서쪽으로, 제4 기갑군은 북동쪽으로 이동시켜

하르코프 포위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제1 기갑군은 도네츠 강 남안에, 제4 기갑군의 선봉은

하르코프 남쪽에서 약 16킬로미터 밖에 있는 모슈 강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3월 5일에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보고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흡족해하던 히틀러는 3월 7일에 즉시 하르코프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그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는 바람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 하르코프를 재빨리 점령할 것은 힘들어 보였지만

 하늘이 독일 편이었는지 난데없이 강추위가 시작돼서

 라스푸티차로 진흙탕이 됐던 도로들이 죄다 얼어붙어 버렸다.

땅이 얼어붙어 기동이 원활해지자

만슈타인은 호트와 상의 끝에 하르코프를 스탈린그라드의 재현 비극의 전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SS 기갑군단이 모슈 강을 도하해 켐프 분견군과 합세하여

하르코프를 물 셀틈 없이 포위하고 조금씩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기로 결정했다.

SS 기갑군단은 명령을 받고 모슈 강을 도하, 3월 9일에는 하르코프 시 외곽에 다다랐다.

 하우저는 공격을 기다릴 생각이 없는데다가

히틀러가 상황이 괜찮으면 하르코프 시를 점령해 나가도 좋다고 하자

 LSSAH 사단을 선봉으로 하르코프 시 공략을 시작했다.

LSSAH 예하 제1 SS기갑척탄병 연대는 제1 SS기갑연대의 전차와

돌격포 지원을 받아 연대장인 프리츠 비트 대령이 지휘하는

'프리츠 비트 전투단'으로 개편되었고 하르코프 북쪽 방향에서 소련군의 방어망을 분쇄해 나갔다.

쿠르트 마이어 소령이 지휘하던 LSSAH 직할 기갑수색대대는

과감하게도 하르코프 시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으로 빠르게 진격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소련군과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마이어의 과감한 공격이 소련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장인 요하임 파이퍼 소령이

단 2대의 하프트랙을 '파이퍼 전투단'로 편성해 마이어의 기갑수색대대 구출에 나섰다.

파이퍼 전투단으로 소련의 공격이 집중되었고

전투단은 파이퍼가 직접 MP-40 기관단총을  잡고 교전해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맞지만,

 결국 붉은 광장에 도달해 제1 SS기갑수색대를 지원하는데 성공했다. 그

리고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1대대가 증원되면서 SS는 붉은 광장을

 거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시내의 소련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붉은 광장은 LSSAH 기갑수색대대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시가전 끝에, 소련군의 최후의 거점인 하르코프 트렉터 공장이 점령되면서,

3월 14일에 하르코프 시가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탈출하던 소련군은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가 친 포위망에 걸려 섬멸되었다.

 LSSAH는 벨로그드로의 진격을 속개하여, 벨로그드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한편 독일 남부집단군이 하르코프와 벨로그드를 재점령하고

 북상을 해서 로코소프스키의 측면을 압박하려는 움직이려 하자

스타브카는 제62군과 제64군을 어떻게든 로코소프스키에게 보내

하르코프 북쪽에서 전선을 회복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도 상관 없이 스타브카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계속 할 예정이었다.

3월 7일에 로코소프스키는 공세를 축소하되,

 북쪽의 오룔을 목표로 한 공세는 지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코소프스키는 겨우겨우 제21군을 전선에 합류시키고

오룔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려 했지만

독일 제2군은 같은 날에 제4 기갑사단과

헝가리군 부대들을 집결시켜 로코소프스키의 서쪽 측면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크류코프의 제2 근위기병군단은 계속된 진격에 지쳐 있는 데다가

너무 넓게 펼쳐져 있어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힘들었다.

결국, 스타브카는 중부에서의 모든 공세를 중단할 것을 결정하고

로코소프스키에게 더 이상 공세를 하지 말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의 무리한 1943년 동계 공세는

만슈타인의 계략에 말려들어 막을 내렸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는 급격하게 소련측으로 기운

독소전쟁의 균형추를 어느정도 독일측으로 돌려놓았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로 기고만장해 있던 붉은 군대는

 52개 사단을 날려버리며 큰 충격을 받았고 독일군은 급한 불을 껐다.

스탈린그라드의 대패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독일군은 만슈타인의 대승으로

한숨 크게 돌릴 수 있었고 이후 벌어진 해빙기 때문에 급한 불은 껐다.

소련군의 공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동부전선은 크게 안정되었다.

반면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와 르제프에서 입은 인적 손실에

하르코프의 대패까지 겹쳤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은 모두 이후 몇개월간은 공세를 펼 수 없었다.

양군 모두 스탈린그라드에서 너무 손실이 컸고,

소련군은 만슈타인의 잔략으로 당했지만,

런저런 이유 및 해방기의 나쁜 도로사정때문에 전선에는 소강상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는 소련이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쉴 틈 없이 몰아붙일려던 야심차기 짝이 없던 작전 자체를 좌절시켜버리고 말았다.

물론 중부집단군을 향한 로코소프스키의 공세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위협적인 공세 중 하나였다는 점을 보아

만슈타인의 대활약은 남부집단군과 물론이고 중부집단군도 온

전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군다나 이 전투 직전에 클라이스트는 A집단군을 무사히 후퇴시키는데 성공해서

 남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얻은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남부집단군의 병력들은 대다수가 겨울폭풍 작전 와중에

많이 지치거나 스탈린그라드에서 힘을 많이 소진한 병력들이었다.

이런 비교적 약체의 병력으로 그런 엄청난 전과를 이뤄낸 만슈타인의 승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로서 만슈타인은 이전의 전투들과 더불어 희대의 본좌이자 명장으로 찬양받게 되는 기록을 남겼다.

만슈타인의 눈부신 재능으로 독일군이 대승을 하긴 했지만,

만슈타인빠들이 주장하듯이 독소 전쟁의 균형추를 다시 평형으로 바꾼것은 아니다.

사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략적 처지는 하르코프 전투 이전에 비해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일단 독일군이 소련군의 50여개 사단을 섬멸시켰다고 하지만

 당시 소련군의 사단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파로 소모가 극심하여

 이미 하르코프에 도달하기 전에 각 사단의 정원이 3000명 이하로 내려갔었고,

 그리하여 병력손실은 8만여명에 불과했다.(독일측 손실은 만여명)

 이정도면 독일의 3배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측으로서는 "견딜만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이미 스탈린 그라드에서 수십만명의 병력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더이상 공세를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동안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섬멸되었고,

서부의 영미군의 압박도 이제 점점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점점 불리해질 뿐이었다.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이쯤해서 전략적 후퇴를 하기를 바랬고,

무솔리니 같은 경우는 히틀러에게 그쯤해서 스탈린과 강화를 하기를 바랬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여름에 쿠르스크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괴멸되어 버린다.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이 아직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더 이상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에 정진했다.

특히 소모의 한계를 넘어선 공세는 역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으며,

이후에 쿠르스크 전투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는

전력이 소진되기 전에 진격을 정지시키고 재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소련군은 한 개 전선군이 재편성할동안 다른 전선군이 공세에 나섰다가

정지하고, 재편성 마친 다른 전선군이 다시 공세에 나서는 식으로

 피스톤과 같이 각 전선군이 공세에 나서는 전법을 완성시켰다.

독일군은 예비군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전법에 크게 당했다.
하르코프 전투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거둔 대규모 승리였다.
만슈타인이 하르코프와 벨로그드를 재점령함에 따라,

소련군 쪽에서 한 지역이 전선에서 돌출되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쿠르스크 전투였다.

독일군은 하르코프를 재점령 후, 미처 후퇴를 하지 못한  

소련군 병원의 부상병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 지휘관 세명은 후에

소련의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photo from :Gamesqur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