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순간-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달라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중심가에서 오픈카를 타고 가던 중 총격을 당했다.
이후 케네디는 그의 암살을 다룬 책만 500여 권에 달할 정도로 숱한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었다.
음모론의 핵심 중 상당수는, 암살범으로 지목된 '외로운 늑대' 리 하비 오스왈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60% 이상이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린 정부의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논란에 불을 지핀 사람은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었다.
케리는 11월 8일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오스왈드가 혼자 범행했다는 사실에 심각한 의심을 품어왔다.
그가 쿠바나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는지,
당시 정부가 오스왈드의 행적을 끝까지 추적했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저격수는 없었고, CIA는 개입돼 있지 않다"며 미국 내부 음모론을 차단했다.
다시 말해 단독 범행이 아닐 가능성은 있지만, 그 배후가 당시 소련이나 쿠바일 수 있다는 얘기다
케리의 의도와 달리 케네디 사망 50주기가 다가올수록 암살의 배후로 가장 주목받는 쪽은 CIA다.
CNN은 케네디 암살에 관해 30년 넘게 연구해온 데이브 페리(Dave Perry)를 인터뷰했다.
그의 말을 빌려 "숱한 음모론들이 있지만 'CIA 관련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고 보도했다.
페리는 "나는 그동안 반(反)음모론자로 불릴 정도로 여러 음모론의 허구를 파헤쳐왔다"며
"하지만 CIA 범행설은 내가 허구를 증명할 수 없는, 가장 가능성이 큰 음모론이었다"고 말했다.
페리의 정리는 이렇다. 당시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케네디의 계획에 반발한
군산복합체가 배후라는 음모론은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케네디는 그런 상황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철수라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스왈드가 소련에 거주한 전력 때문에 소련 혹은 쿠바의 배후설이 나오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소련이 암살을 지시했다면 이후 오스왈드의 범행 배후로 드러날 가능성이 큰데
이는 곧 전쟁, 특히 핵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소련이 그런 멍청한 일을 지시했을 리는 만무했다.
암살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오스왈드가 멕시코시티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CIA는 이 부분에 대한 조사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오스왈드는 미국과 소련에서 고용한 이중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CIA가 케네디의 암살을 지시했을 확률이 제일 높다는 게 페리의 생각이다.
페리는 암살의 이유로 CIA가 당시 세웠던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제거 계획을 꼽았다.
케네디가 이 계획을 반대하면서 양측 간에 갈등이 심해졌고 케네디 암살까지 이어졌을 거라는 얘기다.
'CIA 배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데이브 페리만이 아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기자 겸 작가인 앤서니 서머스도 자신의 책과 강연을 통해 CIA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한다.
서머스도 소련 혹은 쿠바 배후설은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오스왈드는 미국으로 왔을 때
U-2 정찰기 등에 대한 정보를 소련에 넘긴 혐의로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CIA는 오스왈드에게 감옥에 갈 것인지, CIA에 협조할 것인지 선택권을 주었고
당시 지도층은 이런 모종의 계약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다.
CIA가 케네디 암살 관련 자료를 감추고 있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당연하다는 것이 서머스의 주장이다.
미국에서는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음모론이 뒤따랐다. 9·11 테러를 두고
'미국 정부가 전쟁을 벌이기 위한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9·11 음모론'은 국민들에게 크게 와 닿지 못했다.
반면 케네디 암살 음모론은 무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잇달아 발생한 의문의 죽음들이 한몫했다.
케네디 암살범으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사건 이틀 만에
CIA와 연방수사국(FBI) 정보원 역할을 했던 잭 루비라는 남성에게 살해됐다.
잭 루비마저 구치소에서 석연찮게 사망했다.
케네디 암살 이후 3년 동안 암살 사건의 결정적인 증인 역할을 했을 만한 18명이 모두 사망했다.
6명은 총을 맞았고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 책으로 출판하려던 기자 1명은 목이 졸려 살해됐다.
교통사고나 자살도 있었고 심지어는 목이 잘린 시체도 나왔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93년까지 케네디 암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 중 115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대중이 케네디 암살이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믿지 않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음모론이 끊이지 않자 1979년 미국 하원은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해
케네디 암살에 관해 재조사를 벌였다.
조사위원회는 1964년 당시 이른바 '워런 조사위원회'가 밝힌 정부의 공식 입장,
즉 오스왈드에 의한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뒤집어
"케네디는 음모의 결과로 암살되었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 발사된 총알이 세 발이 아닌 네 발일 가능성 등 새로운 결과도 내놓았다.
하지만 위원회는 "또 다른 암살범이 있었는지,
누가 음모를 꾸몄는지는 밝혀낼 수 없었다"고 결론지어
오히려 음모론을 더욱 부각시킨 채 조사를 마무리했다.
잠잠하던 음모론은 19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이 영화 <JFK>를 연출하며 다시 불붙었다.
의혹이 봇물을 이루자 미국 의회는 1992년 '케네디 암살 관련 자료 공개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핵심은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CIA 대변인의 언급처럼 "2017년까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공개되지 않은 자료 중 핵심은 CIA가 오스왈드와
암살 전부터 관계를 맺어왔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내용이다.
음모론의 진실을 밝혀줄 CIA와 오스왈드의 관계는
케네디 사후 54년인 2017년이 돼서야 겨우 밝혀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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