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퉁구스카 사건 - Tunguska Event

슈트름게슈쯔 2015. 11. 21. 13:40



러시아 퉁구스카 대폭발 사건의 위치




이른 아침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이었다. 

천막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천막과 함께 갑자기 공중으로 떠올랐다. 

땅바닥에 떨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모두가 경미한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크리나와 이반은 정신을 잃은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들이 정신을 차릴 즈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주위의 나무들이 온통 불에 타고 있었으며, 숲의 태반이 파괴돼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바노바라 Vanovara의 무역 사무소 베란다에 걸터 앉아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나무통에 마개를 만들어 박으려고 도끼를 잡았을 때의 일이었다·

·····하늘이 둘로 쪼개지고  숲 위의 하늘 전체가 불로 덮인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마치 셔츠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나는 순간적으로 셔츠를 찢어서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때 하늘에서 큰 음향이 들려왔다. 

무엇인가 거대한 것들이 충돌한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베란다로부터 5 m 가량 떨어진 땅 위에 내던져진 채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다. 

아내가 뛰어나와 나를 집 안으로 업고 들어갔다. 

그리고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대포를 쏘는 것 같기도 한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됐다. 

지면은 진동하고 있었는데, 나는 땅 위에 내던져졌을 때 

머리를 손으로 거머쥐었다. 

왜냐하면 돌이 머리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하늘이 갈라져 마치 대포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열풍이

북쪽으로부터 불어와서 우리 집을 스쳐갔다. 

그 바람의 흔적이 땅 위에 남았다······"


(1908년 시베리아 오지 퉁구스카 주민들의 증언)



퉁구스카 폭발사건은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경에 

 러시아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의 포트카멘나야퉁구스카 강 유역 

북위 60° 55′, 동경 101° 57′ 지점의 밀림에서 발생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의 공중폭발 사건이다. 

 불덩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폭발했다. 

폭발한 불덩이는 후에 10-15 메가톤가량 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나무 6~8천만 그루에 해당하는 2,150 제곱킬로미터의 숲을 파괴하였다. 

파괴된 숲에서는 사건으로 죽은 천오백마리의 순록시체와 옆으로 뉘여진 나무들이 발견되었으며,

 전신주처럼 제대로 서있으나 나무들의 가지는 모두 부러진 특이점 또한 있었다.

 어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당시 목격자들도 "450km나 떨어진 곳에 있던 기차를 타고 있었음에도

 심한 땅울림과 함께 돌풍이 몰아쳐서 열차가 전복되었다."

, "사건현장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방목하던 가축 천오백마리가 타 죽었다"라며

 '공포의 불덩이'가 일으킨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언하였다. 

 당시의 폭발력을 현재의 TNT를 기준으로 한다면 5메가톤에 상당한 규모로 추정된다. 

 1931년 옛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모스크바 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조사했으나,정확한 결론은 내지 못했다. 

단지 대운석이 떨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폭발의 원인으로는 블랙홀 추락설, 운석 추락설 등 수많은 가설이 나왔지만 

2013년에 운석 파편을 발견하여 대폭발의 원인이 석질 소행성임을 발견해 냈다.

  핵폭발과 소행성충돌의 경우에만 형성된다고 알려진 충격석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퉁구스카 대폭발의 충격으로  쓰러진 시베리아 삼림의 나무들 - 1927년 클리크 탐험대가 촬영한 사진들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경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포트카멘나야 퉁구스카강 부근의  삼림에서 엄청난 대폭발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사방 25㎞의 동심원 안에 있는 나무 8천만 그루가 쓰러졌으며, 

순록을 비롯해 숲에 살던 모든 동물이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발 지점에서 약 60㎞나 떨어진 마을에까지 엄청난 열기가 덮쳐 은식기가 녹아내렸으며,

 450㎞나 떨어진 곳에서 운행되던 열차는 심한 땅울림에 전복될 정도였다. 

그날 폭발한 에너지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85개에 해당하는 위력이었으며,

폭발지점의 주변 공기 온도는 무려 2만4천700℃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폭발한 지역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외진 곳이었기에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퉁구스카 대폭발’로 일컬어어지는 이 사건은 당시 러시아의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927년이 되어서야 조사단이 꾸려져 정밀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바로 아래 지점인 그라운드 제로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운석충돌구나 운석 파편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UFO 충돌설, 블랙홀 추락설 등 수많은 소문을 낳으며 

러시아 최대의 미스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미 항공우주국(NASA) 등에서는 이 사건이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구 대기에서 폭발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혜성의 경우 얼음과 눈, 먼지가 뭉쳐진 덩어리이므로 

공중에서 폭발할 경우 퉁구스카처럼 흔적이 전혀 남지 않을 수도 있다.  

NASA의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지름 약 37m, 무게 약 10만t에 이르는 물체가

 초속 15㎞ 속도로 돌진해오다가 지상 8.5㎞ 지점에서 폭발한 결과라고 했다.

그 폭발로 거대 운석들 또는 혜성 파편들이 5-10 킬로미터 상공에서 

불타며 떨어져 일어난 것으로 수많은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

비록 운석 또는 혜성 파편들이 지면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 

상공에서 불타며 떨어졌지만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폭발의 에너지는 TNT 5 내지 30 메가톤급 파괴력과 맞먹었으며, 

이는 일본 히로시마(Hiroshima)에 떨어진 원자탄의 천배 규모였다.

 2,150 평방 킬로미터 내의 8천만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졌다. 

이 정도의 폭발이 도시에서 일어났다면 대도시 하나를 파괴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운석 충돌에 대한 대비 논의가 활발해지기도 하였다.

퉁구스카 사건은 지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충돌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해양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규모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을 수 있지만

 이를 감지할 범세계적 인공위성망이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60~1970 년대의 일이다.

1908년 6월 30일 현지시각 오전 7시 17분경 퉁구스카 원주민들과

 바이칼 호(Lake Baikal) 북서부 언덕에 거주하는 러시아 정착민들은

 태양처럼 밝은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로부터 10 여분이 지난 후 포탄이 터지는 것과 유사한 폭음과 함께 섬광이 퍼져나갔다. 

폭발 지점 근방에 있었던 목격자들에 의하면 

이 폭음은 동쪽에서 북쪽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폭음은 충격파를 동반하여 수백마일 밖의 사람들을 쓰러뜨렸으며 

거주지 유리창 수백장을 파괴시켰다.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폭음과 진동만을 보고하였으며 

폭발 자체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가 없었다. 

또한 사건 진행 순서와 진행 시간에 대해서도 목격자들마다 차이를 보였다.

이 폭발은 유럽과 아시아 각지의 지진 관측소에서도 감지되었다.

 비록 1935년까지 리히터 단위가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기록을 리히터 단위로 환산해보면 약 5.0 리히터 규모에 맞먹는다. 

폭발은 대기압에도 변동을 일으켰으며 이는 영국에서도 감지가 가능할 수준이었다. 

폭발로 생겨난 분진들이 성층권까지 날아올라 빛을 반사하면서 

이후 몇주 동안 밤하늘은 밤에도 글을 읽을수 있을 정도로 밝았으며

 미국의 스미소니언 천문 관측소(Smithsonian Astrophysical Observatory)와

 마운트 윌슨 관측소(Mount Wilson Observatory)는 

분진으로 인해 천문 관측이 곤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6년판 기네스북(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은 

만일 이 폭발이 4시간 47분 뒤에 일어났다면 지구 자전으로 인하여 

폭발은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페테스부르크(Saint Petersburg)를 

완전히 파괴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퉁구스카 지역은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는 과학적 관심을 그리 많이 끌지 못하였다. 

만약 사건 현장에 대한 조사가 조속히 이루어졌다면 

보다 많은 사실이 밝혀졌겠지만, 현장 조사는 제 1차 세계 대전, 

1917년의 러시아 혁명, 그리고 이어진 러시아 내전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질 겨를이 없었다.

최초의 현장조사는 러시아 광물학자 레오니드 쿠릭(Leonid Kulik)이 

소련 과학 대학(Soviet Academy of Sciences) 조사팀의 일원으로 실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1년 퉁구스카 강에 도착한 쿠릭은 퉁구스카 폭발이 거대한 운석 충돌로 

일어났다는 지역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채취된 광물이 소련 산업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명목으로 소련 정부의 재정 지원을 이끌어냈다.

쿠릭의 조사팀이 폭발지점에 도착한 것은 1927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장에는 운석 충돌로 생겨났어야 했을 

크레이터(충돌로 생기는 거대한 구덩이)가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50 킬로미터 범위에 걸쳐 불에 탄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폭발지점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의 나무들은 하늘을 향하여 똑바로 서있었는데,

 가지들은 죄다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폭발 지점에서 떨어져 있는 나무들은

 폭발 지점과 반대방향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후 10년간 세 번의 추가 조사가 진행되었다. 

쿠릭은 폭발지점 근방에서 작은 소택지를 발견하여 

이를 크레이터라고 생각하였으나 추가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소택지는 원래 이 위치에 있던 늪이 마른 흔적임이 밝혀졌다.

 1938년 쿠릭은 항공기를 동원하여 상공에서 폭발지역을 촬영하였는데, 

그 결과 폭발지점 주위의 나무들이 쓰러진 형태가 거대한 나비 문양임을 밝혀냈다. 

폭발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크레이터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조사에서 폭발지역 근방의 토양에 미세한 유리질 조각들이 섞여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조각들을 화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조각들에는 니켈과 이리듐 성분이 높았는데, 

이는 운석의 전형적인 성질로써 이 조각들이 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설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1959년부터 체계적으로 목격자 보고 취합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반경 100 킬로미터 이내에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폭발 이후 폭발 지점에 가까운 곳에 살던 주민들은 점차 온몸이 종기로 덮였으며, 

가족들도 곧 같은 증상을 보이면서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조사팀에 참가한 의학자는 연구결과 이것이 폭발과 관련 없는 천연두였다고 결론지었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퉁구스카 사건이 지상 6-10 킬로미터 상공에서 

운석이 폭발하며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운석들은 매일같이 지구의 대기권에 들어오며 대개 초당 10 킬로미터 속도로 

낙하하는 과정에서 대기와의 마찰열로 불타 없어지지만 

간혹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운석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 미처 다 타지 못한 운석이 지상에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2

0세기 후반 대기권에 대한 심층 관찰 결과 이와 같은 운석 출몰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약 10 미터 반경의 운석이 지상에 떨어질 경우

 그 파괴력은 약 20 킬로톤, 나가사키(Nagasaki)에 떨어졌던 원자찬과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다. 

미국 공군의 국방 지원 프로그램(Defense Support Program)은

 이와 같은 크기의 운석이 매년 하나 이상 대기권에 진입한다고 밝혔다. 

퉁구스카 규모의 폭발을 야기할 크기의 운석은 이보다 더 드물다.

 유진 슈메이커(Eugene Shoemaker)는 이와 같은 대규모 운석이 

약 300 년 주기로 대기권에 진입한다고 한다.

퉁구스카 폭발지점 근방의 나무들에 대한 조사팀의 연구는 

1950년대 및 1960년대 대기 핵실험 결과에 영향을 받았다. 

나무들의 쓰러짐은 폭발로 인해 생겨난 충격파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폭심지의 나무들이 똑바로 선채 가지들만 떨어져나간 이유는 

충격파를 수직 방향에서 받았기 때문이며 폭심지에서 벗어난 나무들의 경우

 충격파를 수평 방향으로 받았기 때문에 옆으로 쓰러진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소련에서 소형 폭발물과 성냥개비를 이용한 모의 실험을 실시한 결과 

폭발물의 충격파를 받은 성냥개비들이 쓰러져 나비 문양을 그림으로써 

충격파 가설은 설명되었다. 

퉁구스카 숲의 나비 문양을 토대로 추론해보면 충격파를 일으킨 물질은

 지상으로부터 30도, 북쪽을 기준으로 115도 경로로 접근하던 중 공중 폭발했다.

폭발을 일으킨 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1930년 영국 천문학자 휘플(F.J.W. Whipple)은 이것이 혜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본적으로 얼음과 먼지로 이루어진 혜성이 대기권과의 마찰로 폭발하여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혜성 가설은 사건당시 며칠동안 유럽의 밤하늘이 밝았다는 기록으로 뒷받침을 받았으며 

1960년대까지 소련 퉁구스카 연구자들의 주된 입장이 되었다.

1983년 천문학자 제넥 세카니나(Zdenek Sekanina)는 혜성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게시하였다. 

혜성과 같이 얼음과 먼지로 이루어진 천체는 대기권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와해되어 

그와 같은 사건을 일으킬 수 없다는 논지였다. 

더구나 현장에서 발견된 유리질 파편들은 폭발을 일으킨 물체가

 운석이라는 점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2001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고, 

추가 연구가 진행되면서 퉁구스카 낙하물이 소행성대 방향으로부터 날아왔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혜성 이론 추종자들은 폭발을 일으킨 물질이 혜성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중심에 암석 성분의 핵이 있었을 것이라고 수정된 의견도 내놓았으며, 

1990년대 이탈리아 학자들은 폭발 지점에서 발견된 물질들이

 혜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운석 구성 성분들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석 이론의 맹점은 현장에 큰 규모의 크레이터가 없다는 점이다.

2007년 6월 볼로냐 대학(University of Bologna)의 과학자들은 

퉁구스카 지역에 있는 체코 호수(Lake Cheko)가 크레이터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와같이 엄청난 폭발의 원인을 놓고서 분분한 의견이 엇갈려왔던

베일에 싸여 있던 퉁구스카 대폭발 원인은 

사건이 발생한지 100년도 더 지난 2013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우크라이나, 독일, 미국 과학자들이 대폭발이 일어난 해였던 1908년 

여름의 이탄층(식물이 부분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진흙과 함께 쌓인 층)에서 

미세한 운석 흔적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이탄층에서 채취한 미세한 단편을 화상분광기로 분석한 결과 

다이아몬드와 육방정 다이아몬드, 그라파이트 등이 발견됐다. 

론스달라이트(lonsdaleite)라고도 불리는 육방정 다이아몬드는 

탄소를 많이 함유한 물질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데, 

자연 상태에서는 운석이 지구에 충돌할 때 발생한다. 

육방정 다이아몬드 파편에서는 운석에 포함된 물질들도 발견돼 

운석 충돌로 인한 폭발이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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